척박한 자연환경 극복...주변국과 활발한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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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사 재조명 (3) 탐라의 활발한 대외교류
7세기 탐라의 대외교류.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7세기 탐라의 대외교류.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645년 신라 선덕여왕이 세운 ‘황룡사구층목탑’은 층별로 주변 9개 나라를 의미한다. 이 중 제4층은 ‘탁라(탐라)’를 뜻한다. 이를 통해 탐라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탐라는 5~10세기경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과 비록 동등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적인 정치체였다. 고대 탐라국은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과 화산도라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바다를 매개로 주변국들과 활발하게 대외교류를 이어나갔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한반도의 고대국가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당나라와도 외교와 해상교역을 통해 관계를 맺었다.

▲백제, 고구려, 신라와의 교섭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20년(498) 8월 기록에는 탐라와 백제의 교섭 양상에 대한 기록이 실렸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20년(498) 8월 기록에는 탐라와 백제의 교섭 양상에 대한 기록이 실렸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탐라국이 삼국 가운데 처음 공식적인 관계를 맺은 기록이 확인되는 나라는 ‘백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476)의 기록에 따르면, 탐라국은 방물(方物), 토산물을 바치고, 이에 문주왕은 은솔(恩率)이라는 관직을 주었다고 적혀있다. 같은책 동성왕 20년(498)에는 탐라가 백제에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자, 백제가 정벌하러 남진하러 가다가 탐라가 사죄하므로 무진주에서 멈췄다는 기록도 확인된다. 탐라는 백제에 공부, 즉 세금을 내며 관계를 유지하는 부용국(附庸國)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탐라와 고구려와의 교섭 양상은 중국 사서인 ‘위서’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한다. 문자왕 13년(503)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문자왕이 북위에 보낸 사신 예실불이 북위 세조에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옥(珈玉)은 섭라(涉羅)에서 나는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나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기에 이 두 물건을 바치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탐라는 660년 백제 멸망 이후인 7세기 중반, 삼국 중 가장 늦게 신라와 관계를 맺었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에서는 문무왕 2년(662) ‘탐라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이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탐라는 무덕(武德) 연간 이래로 백제에 신속(臣屬)해왔기 때문에 좌평을 관직 호칭으로 썼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해서 속국(屬國)이 되었다’고 적혀있다.

▲일본, 중국과 교역하다

백제 멸망을 기점으로 탐라는 일본과 중국 당나라를 비롯해 신라를 상대로 다각적인 교섭을 진행하며 급변하는 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665~693년간 탐라는 10회, 일본은 1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탐라 주도의 빈번한 교섭관계가 이뤄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같은 해 8월, 탐라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중국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이 중국 역사서인 ‘당회요’ 권100 탐라국에서 확인된다.

▲고려로부터 독립을 열망하다.

탐라와 고려와의 관계는 후삼국 시대인 925년(태조 8) 고려에 특산품을 바치면서 시작된다. 이후 938년(태조 21) 탐라국주 고자견이 태자 말로를 파견해 입조함으로써 성주·왕자 작위를 하사받는다. 탐라는 1105년(숙종 10) 고려의 지방 행정단위의 하나인 탐라군으로 편입된다. 송·여진과 더불어 팔관회에 참석하는 등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받던 탐라는 1153년(의조 7) 탐라현으로 강등돼 현령관이 파견됨으로써 자치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중앙 권력과 제주민간의 갈등이 고조돼 간다.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22년(1168) 11월 기록에는 탐라국의 부활을 꿈꾼 ‘양수의 난’에 대해 기록됐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22년(1168) 11월 기록에는 탐라국의 부활을 꿈꾼 ‘양수의 난’에 대해 기록됐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168년(의종 22) ‘양수의 난’을 시작으로 1374년(우왕 즉위년)~1375년 ‘차현우의 난’에 이르기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고려의 탐라 지배에 저항하는 독립항쟁이자 잃어버린 탐라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고려사’에는 이를 단순 ‘민란’이 아닌 ‘반란’ 혹은 ‘모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탐라국의 독립을 우려하는 고려 조정의 경계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삼별초의 난’에 대해 탐라인 다수는 삼별초에 협조해 대몽항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러나 1273년(원종 14) 여몽연합군에게 삼별초가 패하면서 대몽항쟁도 막을 내린다. 탐라는 100년간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지배받게 된다. 고려 조정에서 부임하는 관리들의 핍박과 수탈을 감내해야 했던 탐라인들은 삼별초 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해 합세해 여몽연합군에 항거했던 것이다.

▲조선후기 고지도에 드러난 ‘탐라’

 
제목을 ‘탐라’라고 한 18세기 채색 필사본 지도 ‘고지도첩’ 가운데 ‘탐라전도’.(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1105년(고려 숙종 10),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지녔던 탐라는 고려의 군현 가운데 하나인 탐라군으로 편입됐다. 이후 고종 연간(1213~1259)에는 바다 건너의 고을이라는 의미의 ‘제주(濟州)’라 바꿔 불리기 시작했다. 삼별초 정벌 이후 원나라(몽골) 직할지가 되면서 탐라(국)이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긴 했지만, 1294년(고려 충렬왕 20) 고려에 반환됨에 따라 제주란 이름을 복구시키면서 섬나라 ‘탐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에 편찬된 고지도를 포함한 각종 관·사찬 기록의 제목에는 여전히 탐라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는 곧 과거 이 땅에 탐라국이 존재했던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특히 조선시대 ‘제주’가 아닌 ‘탐라도성’이라는 호칭이 들어간 지도와 함께 1841년 이원조가 제주목사로 부임할 때 받은 깃발 ‘탐라제군사명기’에도 ‘탐라’로 표기된 것은 탐라국을 독립된 나라로 인지해온 역사관이 담겼다는 근거가 되고 있다.

박찬식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장은 ‘탐라 복권의식의 변천’을 주제로 한 논고에서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왕조는 철저하게 탐라를 내지(內地)로 종속시킨 중앙권력이었다”며 “조선초기 성주청, 왕성, 칠성당의 훼철, 탐라 지배층 성주, 왕자직의 폐지, 출륙금지령 포고, 탐라호국당인 광양당의 혁파 등은 탐라의 정신적 유산을 소멸시키려는 강력한 중앙 지배력의 방침이었다. 이러한 중앙의 ‘탐라 지우기‘에도 불구하고 제주민들은 끊임없이 탐라를 꿈꿨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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