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 겪은 무고한 주민 원혼 달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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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6선 국회의원 출신 현오봉

현승오, 정의초 개교 당시 주민 부담금 전액 부담
현시화, 표선면 세화리 출신 일제강점기 항일 활동
현오봉, 여당 원내 총무 역임…제주장학재단 설립

▲현승오玄承五:생몰년 미상, 사업가, 양조업 운영, 일명 현갑용(玄甲龍), 본관은 연주, 주로 통조림업으로 일찍이 정의지방에서는 가장 유명한 갑부였다. 


1923년 성산면 정의초등학교(현 동남교)가 개교하게 되니 주민 부담금을 혼자 부담해 교정에는 그의 공덕비가 교문 입구에 있다. 


장손 현호진의 아들 광호(1940년생)도 육사를 졸업하고 소령으로 제대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자녀 교육에 힘써 장남 현호진(1907년생), 차남 현호경(1910년생), 장녀 현호옥(1913~1980) 등 3남매 모두 일본유학을 보냈다. 


그의 부인은 기미 3·1 운동에 가담했던 탁명숙(본명 봉학), 현호경과 현호진은 일본 공산당, 현호옥(여)은 일본 오사카에서 전협 활동을, 현승오는 신학문·신교육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장남 현길홍은 가업을 이었다.


▲현시화玄始化:1892(고종29)~1968, 민족종교 무극대도교의 항일 활동. 본관 연주, 현유형의 아들로 표선면 세화리<는-곶>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한때 민족 종교인 보천교를 믿었다. 그는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현오봉玄梧鳳:1922(일제강점기)~1982, 정치가. 6선 국회의원. 호는 남정. 본관은 연주, 성산읍 시흥리<심돌>에서 현영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일해 1943년 흥국상업학교를 졸업, 광복 후 김봉호 제주경찰감찰청장 밑에서 1947년 5월 8일 초대 공보실장으로 발령받았다.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남제주에서 무소속으로 당선. 1963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당선 원내 총무로,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동창회장, 서울대학교총동창회 부회장 및 제주장학회(제주장학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 1979년 12월 천주교에 귀의(세례명:베드로)했다. 


1979년 5·17 계엄조치로 국가보위회의가 강화되자 그의 정치 활동도 끝났다. 1982년 서울에서 타계했다. 통신과장과 공보실장을 거쳐 상공부 법령계장을 역임했다. 1956년 대명광업개발 전무로 있으면서 이는 부인 강정순의 도움이 컸고 자유당 내분과 공천탈락자의 이탈로 조직이 분산된 때문에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다. 현오봉 의원이 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여당은 새로운 활력을 찾게 됐다. 현오봉은 자유당 원내 부총무로 발탁됐다. 따라서 1960년 5월 23일 고담룡 의원은 김두진, 현오봉 두 의원과 함께 “4·3 사건으로 제주도 각처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한 무고한 주민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4·3 사건의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고 제의한 결과 국회 양민학살진상 조사단의 조사 대상지역에 경남 거창지구와 같이 제주지역이 포함됐다. 그러나 4·19로 논의가 활발해졌던 이 문제는 다음해 5·16 정변이 일어나면서 원천적으로 논의마저 봉쇄됐다. 이후 4·19와 5·16으로 정치 활동이 중지돼 의원직을 상실한 상태였다. 정치 활동이 허용되면서, 1963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운영위원장 겸 민주공화당 원내 총무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4월 18일 현오봉, 임병수 제주출신 두 국회의원을 대동하고 내도, 제주의 건설상을 돌아보고, 정우식 지사에게 “제주는 사면이 바다인 까닭에 시급한 것은 어업 전진기지이며, 관광개발과 감귤·양송이 재배와 축산단지 조성에 노력하되 투자 효과를 감안해 우선 순위를 세워나가야 한다.”고 지시했다. 


현오봉 의원으로서는 호기를 잡아 예산확보와 대정부 절충에 힘써 본도 물의 혁명을 가져오게 했으며 그로서의 정치력을 크게 발휘하는 단초가 됐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당선돼 국회운영위원장이 되고 재일교포의 재산반입에 따른 면세 특혜조치가 재무부에 의해서 반려됐다는 사실을 알게 돼 이로써 교포들의 재산반입이 백지화되자 1968년 1월 30일 도에서는 중앙 관계부처에 진정한 결과 박충훈 경제기획원장과 현오봉 의원의 노력으로 사전 승인만 받으면 재산반입이 가능하게 됐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당선돼 원내 총무로, 1973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국회의원으로 제주도에서는 현오봉(50)을 천거했다. 이는 유신헌법에 의해 임기 3년의 국회의원을 동년 3월 7일 11시 시도 지역 회의에서 선출했는데 각 직능별 인사들이 천거돼 선출했다. 이들은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제9대 국회의원이 되자 현오봉은 건설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또 1976년 유신정우회 정책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한편 1977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도에 삼별초위령탑을 건립하도록 유정회 정책위 의장인 그에게 지시하였다. 동년 7월 21일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 현장에서 기공식을 가져 1978년에 사업을 완성했다. 


또 제주대학 이설 사업은 1979년까지 완료하고 관광 숙박시설을 조기 착공, 관광객 유치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1978년 12월 12일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현 의원은 국회운영위원장 겸 원내 총무 및 당무위원, 그리고 한·콜롬비아친선협회 회장 등을 맡으며 여야의 정치적 쟁점과 격돌의 위기를 조정하는 소임을 맡았다. 실은 제주도에 있어서 유정회 소속인 현오봉이 공화당으로 다시 복귀해 앞으로의 ‘제주도개발촉진법’을 서둘도록 배려한 것이다. 1973년 2월 현오봉은 유신체제 아래서 처음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의(유정회 소속) 6년 임기가 1979년 3월 11일에 만료되게 되자 이에 앞서 총선을 실시, 유신 2기를 출발하게 한 것이다. 10대 의원은 1년 7개월만에 국회가 해산되자 정계 은퇴, 정치의 영욕과 인생의 무상을 함께 느끼며 천주교에 귀의해 정치가 없는 공간에서 2년을 보내고 이승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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