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에 묻힌 탐라의 역사를 발굴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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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사 재조명 (4) 탐라의 자취

조선 유학자들, 문집서 '제주' 아닌 '탐라' 표기 많아

조선후기에도 탐라를 독립된 나라로 인지한 역사관 담겨
삼신인이 땅 속에서 나온면서 탄생 설화의 성소가 된 삼성혈 내 모흥혈 모습.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삼신인이 땅 속에서 나온면서 탄생 설화의 성소가 된 삼성혈 내 모흥혈 모습.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탐라는 1416년(태종 16) 조선 중앙정부에 의해 삼읍체제(제주목·대정현·정의현)로의 행정구역 개편과 제주목사 파견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선에 예속된다.

그러나 당시 제주를 오갔던 조선의 유학자들이 제주에 대해 남긴 저서 일부에서는 제목을 ‘제주’가 아닌 ‘탐라’로 하고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고려사’에 기록된 탐라건국신화를 인용하며 탐라의 시조 삼신인의 배우자인 삼공주가 일본에서 왔다는 것을 주장하며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는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1권에는 탐라에 대한 소회를 읊은 권근의 시가 실려있다.(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1권에는 탐라에 대한 소회를 읊은 권근의 시가 실려있다.(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 변방의 섬 ‘탐라’ 작품에 담기다

‘탐라/푸르르고 푸른 한 점의 한라산이/만경창파 아득한 속에 멀리 있네/사람이 별을 움직여 바다 나라에 왔었고/말은 용의 씨를 낳아서 천한에 들어갔다오/땅은 궁벽되나 백성들이 업이 있어 살아가고/바람이 편하면 장삿배가 겨우 오고갈 뿐이로다/성군의 시대에 직방에서 판적을 꾸밀 때/그 고장 누추하지만 부디 빠뜨리지 마옵소서(태조실록 11권. ‘탐라’에 대한 소회를 읊은 권근의 시)’

탐라는 조선시대 중앙집권체제 하에 편입되며 작지만 강한 독립국으로서의 섬나라 ‘탐라’의 흔적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 당시 제주를 오갔던 관료와 유배인 등 조선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이 저술한 문집 제목을 제주가 아닌 ‘탐라’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들의 문집 속에는 탐라에 대한 연혁을 기록하기도 하고, 모흥혈과 삼사석 등 탐라 유적을 답사하면서 탐라의 자취에 대한 안타까운 심회를 시로 읊고 있다.

이밖에도 탐라와 모흥혈에 대한 소회를 읊은 최부의 시가 ‘남사록’에 실렸고, ‘점필재집’에는 김종직의 시 ‘탁라가 14수’가, 팔오헌선생문집에는 김성구의 시 ‘모흥혈 차 김청음운’이 실렸다.

김정은 ‘노봉집’에서 ‘탐라성에서 손님을 전별하며’를 통해 탐라에 대한 소회를 풀어냈다. ‘탐라록’에서는 제주목사 이형상의 ‘삼성묘 봉안 제문’과 이원조의 시 ‘삼성혈’도 실렸다.

‘탐라’라고 기재된 19세기 이원조 제주목사 부임시 깃발 ‘탐라제군사명기’(국립제주박물관 복제품)
‘탐라’라고 기재된 19세기 이원조 제주목사 부임시 깃발 ‘탐라제군사명기’(국립제주박물관 복제품)

▲조선 후기 ‘탐라’의 향기

‘탐라제군사명기(耽羅諸軍司命旗)’는 1841년(헌종 7) 이원조가 제주목사로 부임할 때 교지와 함께 받은 깃발이다. ‘사명기(司命旗)’는 조선시대 각 영의 우두머리가 휘하의 군대를 지휘할 때 쓰던 깃발로 대장의 방위에 따라 바탕색이 달랐으며, 하단에는 오방 색깔의 비단으로 만든 미대(尾帶)를 달았다.

제주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가운데 ‘제주조점’에는 선두에서 이형상 목사가 행력할 때 앞에서 해당 깃발을 높이 매달아 목사의 행차를 알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탐라수륙제군사명기(耽羅水陸諸軍司命旗)’는 이규원이 1891년(고종 28) 제주목사 겸 찰리사(察理使)로 부임할 때 받은 깃발이다. 찰리사는 조선후기 군사적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됐던 임시관리를 말한다. 이규원은 1891년 정의현에서 이완평 등이 일으킨 민란과 일본인이 제주 연안에 무단 침탈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임명됐다.

두 가지 ‘사명기(司命旗)’ 모두 공통적으로 제주가 아닌 ‘탐라(耽羅)’로 기재됐다. 제주목사의 통수권을 상징하는 군기(軍旗)이지만 ‘탐라’로 표현된 것으로 볼 때 조선 후기에도 탐라국을 독립된 나라로 인지해온 역사관이 담긴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1910년 전후 반지점 발행 사진엽서. 상단에는 삼성혈 경내에 있는 삼성사 사진을 넣고, 하단에는 ‘고려사’ 속 탐라건국신화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1910년 전후 반지점 발행 사진엽서. 상단에는 삼성혈 경내에 있는 삼성사 사진을 넣고, 하단에는 ‘고려사’ 속 탐라건국신화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속 탐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식민지배와 자원침탈을 위해 제주를 찾았다. 이를 사진과 엽서 등으로 남겨 신민지 근대성을 과시하고 식민정책을 선전하는 자료로 사용했다.

탐라 건국의 발상지인 ‘모흥혈’ 역시 식민통치의 정당화를 위한 고적 조사사업 대상에 포함됐다.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성안 ‘반지점(伴支店)’에서 발행한 ‘제주도 삼성혈 사적’ 제목의 사진엽서는 2단으로 구성돼 상단에는 삼성혈 경내에 있는 삼성사 사진을 넣고, 하단에는 ‘고려사’ 고기(古記) 속 탐라건국신화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탐라의 시조 삼신인의 배우자인 삼공주가 일본에서 왔다는 것을 주장했다.

1929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생활상태조사’에 ‘삼여신의 제사’ 제목의 사진이 실려있다.(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1929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생활상태조사’에 ‘삼여신의 제사’ 제목의 사진이 실려있다.(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1929년 조선총독부가 발행을 주도한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의 ‘생활상태조사’에는 탐라의 시조 삼신인의 배우자인 삼공주가 오곡종자와 우마를 가지고 일본에서 왔다는 것을 재현하는 사진 ‘삼여신의 제사’가 실렸다.

일선동조론 사관을 주창했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蔵)와 연구진들은 1914년 5월 제주에 도착해 20일간 머물게 된다. 이들은 1914년 6월 6일 관덕정 앞마당에서 고대 탐라국으로부터 이어져 온 입춘의례를 제주의 남녀 가무단에게 시연시켜 촬영한다. 이 사진은 1920년을 전후해 사진의 내용과 다르게 ‘제주도 기생들의 춤’ 제목으로 반지점 발행 사진엽서로 발행된다.

1914년 촬영된 ‘탐라국 입춘의례’ 모습을 담은 사진이, 1920년 전후 ‘제주도 기생들의 춤’이라는 제목의 사진엽서로 발행됐다.(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1914년 촬영된 ‘탐라국 입춘의례’ 모습을 담은 사진이, 1920년 전후 ‘제주도 기생들의 춤’이라는 제목의 사진엽서로 발행됐다.(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박찬식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장은 “실제 탐라 문화의 형체는 1105년 멸망 이후 900년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랜 세월을 지내며 탐라에 대한 기억마저도 사라지고, 일제강점기하에서 문화적인 정체성을 혼동한 반민족 지식인들이 횡행했다”며 “그러나 탐라의 역사는 심방의 주술과 본풀이, 민중들의 구비전승을 포함해 여러 문헌을 통해 살아남았다. 땅속에 묻힌 탐라의 유구와 유적 역시 앞으로 고고학 전문가의 체계적인 발굴과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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