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으로 성읍마을 조망도 ‘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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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정의현에 유배된 인물들(2)

조선 왕조 비극…‘규창집’, ‘건거지’에 남겨져
조정철, 정헌영해처감록에 제주 유배생활 기록

정의현에 유배된 왕족에는 선조의 7번째 아들인 인성군 가족과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세 아들 등이 있다. 


▲선조의 아들 인성군(仁城君) 가족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 재위 시 인목대비 폐위를 주장했다는 혐의로 처벌이 논의되던 인성군은 잇따른 역모 사건에 휩싸여 1628년 유배지 진도에서 죽임을 당한다. 또한, 그의 부인 윤씨와 자식들(아들 5·딸 2)은 정의현으로 이배된다. 이듬해 나이든 3형제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구금에서 풀려나지만 서로 떨어질 수 없다며 함께 유배생활을 한다. 


1635년 세 아들(이길·이억·이건)이 강원도 양양으로 이배되자 어머니와 동생들은 양양까지 동행했다가 한양으로 돌아간다. 유배생활 중 제주여인과 혼인한 첫째·둘째·넷째 형제는 출륙금지령으로 부인과 자식을 두고 떠나가야 했다. 이후 인성군의 자식들은 복권이 되어 왕족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셋째인 이건은 유배생활 중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가 담겨진 시문집인 ‘규창집(葵窓集)’을 짓는다. 여기에 제주를 떠나는 날 화북포구에서 이별을 슬퍼하는 여인에게 써준 ‘송별연에서 기녀에게 줌(祖席贈歌妓)’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검은 나귀에 술 싣고 홀로 찾아와
(靑驢載酒獨相尋) 
다정한 뜻 은근히 나그네 마음 위로하네
(情意慇懃慰客心)
두 줄기 흘리는 눈물 하 많은 한
(別淚雙行兼百恨)
이별가 한 곡조가 천금이네
(離歌日曲直千金) 
생전에 다만 꽃이 아니었을까
(生前祇是思花貌) 
떠난 뒤 옥 같은 소리 못 들으리니
(去後那堪隔玉音)
오늘 나그네의 감회 깊이 사무쳐
(今日羈懷惼感慨)
흰 구름 안개 속 수심 져 읊고 있네
(白雲煙景入愁吟)


제주에서 낳은 세 형제의 자식들은 훗날 아버지 곁으로 가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출륙이 금지되다가 자식이 혼인할 때 상봉하게 된다. 그 장면을 읊은 시가 다음의 ‘자모봉(子母逢)’이다.

 

인간사에 무슨 일로 슬픔을 감당하나
(人間何事最堪悲)
15년을 생이별이라니
(十五年來生別離)
아들과 어미가 만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子母相逢不相識)
머뭇거리며 웃고 물어보네, 내 아들이냐고
(躊躇笑問是吾兒)

 
▲비운의 왕족인 소현세자 가족


소현세자 세 아들도 ‘강빈옥사(姜嬪獄事)’ 사건으로 제주로 유배된다. 강빈옥사는 1646년(인조 24) 소현세자 부인인 강빈(姜嬪)이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사(賜死)된 사건이다. 


조정에서는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석철·석린·석견)을 처음에는 제주목·정의현·대정현에 각각 유배하려다가, 나이가 어려 한곳에 의지하며 살도록 했다. 첫째와 둘째가 병사한 1648년, 유일하게 살아남은 셋째 석견의 나이는 5세였다. 훗날 복권이 되어 경안군(慶安君)에 봉해진 석견은 아들 둘을 두는데, 이혼(임창군 臨昌君)과 이엽(임성군 臨城君)이 그들이다. 


1679년(숙종 5) ‘임창군이 왕실의 종통이니 그를 보위에 올려야 한다’는 괘서사건으로 임창군 형제는 제주·해남·삼척 등지에서 5년간 유배생활을 한다. 임창군은 제주목에, 임성군은 정의현에 1679년부터 이듬해까지 유배된다. 유배에는 어머니 허씨와 임창군 부인 박씨도 동행하는데, 어머니 허씨는 유배생활을 기록한 한글일기인 ‘건거지(巾車志)’에 당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이들을 돌아보니 각각 쓰러져 한참 깊이 잠들어 있다. 저 어린 것들이 어찌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가련한 모습을 내게 보이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갈가리 찢어져 탄식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나도 몰래 눈물이 얼굴을 덮었다.”


이후에도 임창군 장남인 밀풍군(密豊君)이 이인좌의 난 때, 막내인 밀운군(密雲君)이 나주괘서사건 때 연루돼 죽임을 당하니, 소현세자 가문은 참으로 슬픈 비운의 가문이라 하겠다.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조정철(趙貞喆, 1751~1831)


조정철은 1777년(정조 1) ‘정조시해미수사건’에 처가가 관련돼 제주목에 유배된다. 삼엄한 감시를 받던 조정철의 적소를 제주여인 홍랑(홍윤애)이 드나들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이들의 만남은 사랑으로 이어져 딸 하나를 둔다. 

1781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소론인 김시구가 조정철을 모함하기 위해 홍랑을 고문하지만, 홍랑은 죽음으로 조정철을 변호한다. 조정철은 무혐의로 밝혀지나 이후 정의현으로 이배된다. 제주 27년간의 유배생활 중 조정철의 정의현 유배기간은 9년이다. 조정철은 유배생활을 기록한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을 남겼다. 순조 즉위로 풀려난 조정철은 1811년(순조 11) 나이 60에 자임해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곧바로 옛 연인 홍랑의 묘를 찾아가 그녀의 넋을 위로하는 묘비를 세우고 딸과 사위를 만난다. 제주 유배인 중 가장 극적인 곡절을 겪은 이가 조정철이다. 다음은 정의현 유배 중에 조정철이 지은 글이다.

 

정의성 소녀들 뙤약볕에
(㫌城小女値朱炎)
아래로 치마도 아니고 위로 적삼도 아닌 옷에
(下不爲裳上不衫)
十자 길 저자거리
(十字街頭闤闠地)
허벅지고 물 길러 가며 재잘거리네
(負甁汲水語喃喃)

 


정의현에서 조정철과 깊이 교류했던 인물로 서귀포시 토평동 출신인 부종인(夫宗仁)이 있다. 당시 정의향교 유생인 부종인은 조정철을 만나 학문적 교류를 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대정현감 등을 지낸다. 1790년(정조 14) 조정철이 추자도로 이배되기 전날 밤 부종인이 찾아가 이별의 정을 나눈 글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목숨이 주방에 매여 있으니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命繫庖廚可自由)
북쪽에서 온 소식으로 수심이 일어나네
(北來消息使人愁)
생사가 갈리는 오늘 밤
(死生訣別只今夜)
서로 보내는 허망한 창가에선 눈물이 흐르려 하네
(相送虛窓淚欲流)

 


정의현 유배객들은 어디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옛 사료를 토대로 그 시대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스토리텔링(storytelling)으로 엮어보면 정의현 역사는 한결 혼이 더해지고 성읍마을에 대한 조망도 그만큼 풍성해지리라 여겨진다.


글·사진=강문석 (사)질토래비 전문위원·성읍별곡사진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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