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윗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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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숙 수필가

가위가 춤추는 계절이 돌아왔다.

계속되는 궂은 날씨에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자, 전화가 걸려 왔다. 꼭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이웃 언니의 당부 말씀. 이내 철물점 쪽으로 운전 중인 차를 돌린다. 서툰 장수가 연장 치레나 한다고 이왕이면 날이 잘 드는 가위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한 달 전부터 귤 따기에 알맞은 날이 오면 지켜야 하는 약속이 있었다. 아침에 나갈 채비를 미리 해놓고, 늦잠 자느라 낭패 보는 일이 없도록 스마트 폰 알람 설정 후 잠자리에 들었다. 농번기의 부족한 일손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신한 지 오래이지만 오죽하면 왕초보인 나에게까지 일손을 보태달라는 부탁이었다.

어스름 새벽, 과수원 초입에서 모닥불이 춤을 춘다. 한바탕 전위를 가다듬기 위한 불 쬐기는 필수코스. 숨 고르기가 끝나면 준비한 가위를 들고 귤밭 사이를 샅샅이 누빈다. 귤 한 알에 가위질 두 번. 노련한 할머니들은 귤을 하루 몇백 킬로그램씩이나 딴다는데…. 하루 종일 몇 번의 가위질이어야 가능한 걸까. 그러고 보니 작업복 차림을 한 어머니들의 휘어진 다리가, 마디마다 뭉툭한 손가락이, 밀감나무 가지와 무척이나 닮았다.

한참 귤을 따다가 밀감나무들을 돌아보았다. 가지가 휘도록 매달았던 짐을 부려놓아서인지 이파리부터 생기를 되찾는 게 보인다. 젖을 빨다 잠결에 떨어진 아기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숨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속속 채워지는 귤 바구니도 초록의 잎사귀들 사이로 색의 대비가 청량하다.

어린 날, 별로 넓지도 않은 땅뙈기에 감귤 묘목을 심던 날의 풍경이 어렴풋하다. 막냇동생의 생일을 생각해 보면 ‘부지깽이를 꽂아 놓기만 해도 싹이 난다’라는 이른 봄날이었지 싶다. 몸을 푼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머니는 방에 누워 있고, 동네 사람 몇 명이 아버지와 나무를 심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작은 과수원에서도 소출이 꽤 괜찮았다. 다른 농사와 병행한 귤 농사는 당시 귤나무 두 그루만 있어도 자식을 대학 보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가계에 보탬이 되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준 셈이다. 어디 그뿐이랴. 수확이 끝난 귤밭에는 미처 따지 못한 밀감이 불 켜진 전등처럼 나무 꼭대기에 남아있기 마련이었다. 눈이 펄펄 내릴 때 뛰놀다 와서 따먹는 귤 맛이란. 목마름을 가시게 하고 허기를 달래는 밥이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아침나절만 해도 귤나무에 된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열매마다 얼음 고물이 덮여있어, 어쩌다 수확 시기가 늦어서 저장성이 떨어질까,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기온이 오르고 바로 출하하는 귤은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일과를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차 안. 누군가 방금 딴 귤을 까서 입 안에 넣어준다. 어쩌다 손놀림이 빗나가 가위에 상처 난 귤처럼, 손이 가위에 집히고, 옷의 등허리가 터져 솜이 풀풀 날려도 차 안에는 귤 향기로 가득하다.

가윗밥이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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