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노년세대-사랑이 무겁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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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제주장수복지연구원장/논설위원

무슨 깊은 뜻이 있었을까? 1923년 3월에 태어난 막내딸에게, 할아버지는 성춘(成春)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렇게 인생을 봄처럼 살아라, 봄을 이루어라 일러주고서, 당신은 1928년 1월에 함경환 사건으로 돌아가셨다. 함경환은 제주-시모노세키를 운항하는 여객선으로, 제주섬을 한 바퀴 돌아서 일본으로 향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큰개물 포구에서 승객을 종선에 실은 후, 주상절리 가까이 정박한 함경환에 태웠다. 그날은 본선으로 승객들이 옮겨 타는 도중에 갑자기 돌풍이 불었다. 종선을 뒤집어엎은 바다는 중문면 주민 32명을 집어삼켰다. 대포마을에 정월 초나흘 제사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큰갯마을, 2001, p.241). 


막내딸에게 사다주마 약속한 꽃신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까? 이제는 백 세를 넘긴 어머니가, 어느날 생소한 이름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술래잡기하듯이, ‘성아, 성우, 성은, 성택, 성숙, 성냉…’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얼른 받아쓰기를 하고서, 가만히 살펴보니, 성냉은 어머니를 그토록 아껴주던 막내 외삼촌인 듯했다. 온 집안이 영장을 치르느라 비탄에 잠긴 가운데, 7살 성남이는 배고파 우는 5살 성춘이를 데리고 이웃 초상집에 가서 밥을 먹였다. 그 시절의 서러움이 그리움이 되었다면, 외할아버지 김광용 님이 약속한 꽃신도 어머니 품에 안겼으리라. 


백세 이후부터 3월이 되면, 혹시나 어머니의 마지막 봄일까 싶은 염려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올해처럼 수선화가 유난히 고와도 애가 쓰이고, 동백꽃이 특별히 붉어도 속이 저린다. 이제 102세가 되셨으니, 살면 얼마나 더 사실까 하는 주위의 오지랖도 신경 쓰인다. 그래서 이따금 고향 마을로 소풍을 간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모자부터 신발까지 분홍색으로 단장하고 나서면, 눈부신 햇살이 우리와 함께 고향으로 향한다.


올해는 언니와 같이 소풍을 떠났다. 어머니와 셋이서 겨울밤의 해삼·소라·문어를 잡던 당압개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한눈에 그 지경을 알아보시고, ‘이 바당은 해섬이 하영 나는 디여’라며 좋아하셨다. 역시 대포마을의 10대 해녀회장다우신 눈썰미다. 우리가 새벽 두세 시에 나가서 해삼을 잡던 모살통의 바위가 삐죽이 검은 머리를 내밀고 있다. 부딪치는 파도에 아랑곳 않는 바위는, 분명히 그 밑에 드넓은 암초(여)를 거느리고 있을 게다. 갑자기 언니가 입을 열었다. “중학생 땐데, 어머니가 저 여 밑으로 숨비질을 해보라는 거야. 나는 쑤욱 쑥 들어가서 바닥을 치고 힘차게 올라왔지. 저 정도에서는 충분히 물질을 하겠더라고. 근데, 그뿐이었어. 아마 어머니가 같이 물질을 하자고 했으면, 더 이상 학교는 안갔을 거야…”라는 언니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제주도 속담에 ‘똘 나민 도새기 잡앙 잔치허곡, 아들 나민 조름팍 찬다(딸 낳으면 돼지 잡아서 잔치하고, 아들 낳으면 엉덩이 찬다)’는 말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해녀의 물질은 살림 밑천이 될 만큼 경제력이 있었다. “어머니, 무사 날 해녀 시켜주지 안 헙디가?”라는 언니에게, “물질은 위험헌 거여. 목숨을 내놓고 허는 일이난…!”이라신다.  그 목숨 건 물질로, 어머니는 2남 7녀를 학교에 보내셨다. 밭에서 김을 맬 때도, 고구마가 뿌리를 내리는 이랑뿐 아니라 고랑도 일일이 만져주셨다. 가을이 돼 고구마를 캘 때면, 그 자리에서도 앳된 고구마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어머니의 삶도 고단한 고랑을 벗어나려나.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노년의 삶이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제주도의 백세 어르신들 모두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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