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솜허지 말고 골아보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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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비평가/논설위원

서울의 어느 모퉁이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주절거린다. 12권이나 되는 김석범의 ‘화산도’를 함께 읽자고 2017년 재경 청년 유족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4·3문학회’다. 그들이 매달 현기영의 ‘마지막 테우리’와 같은 소설, 장한철의 ‘표해록’ 같은 고전을 비롯하여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같은 외국 논픽션에 이르기까지 읽고 토론하기를 거듭한 지 벌써 8년째다. 


그들이 제주4·3 76주년을 맞이하며 새봄에 ‘골아보카’라는 책을 낸다. 권두언에는 “4·3의 진실에 관하여, 혹은 4·3 문학의 향방에 관하여 이제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이 책을 출간하려는 기획이 시작되었습니다.”라고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 든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속솜허라(말하지 마라)’고 시작된 금기를 이제 끊임없이 말해볼 때가 되었다며 ‘골아보카’(말해볼까)라는 제목을 걸고 나온 것이다. 


문집의 ‘제주4.3과 나’라는 특집 기획에는 “호기심이라도 발동하여 좀 더 들어볼라치면 어머니는 갑자기 긴장하시며 ‘속솜허라, 속솜허여사 산다,’ 하며 스스로 다짐을 두듯이 침묵하셨다. ‘속솜허라’는 말은 어머니에게서 들어본 나의 기억 속 제주4·3 관련 낱말 조각 하나이다.”(양영심)라는 대목이 나온다. ‘속솜허라’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폭압적 현실 앞에서 애도도 마음껏 하지 못하고, 치유 없이 곪을 대로 곪은 상처를 의미한다. 말 안 하면 귀신도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신물이 날 정도로 이야기해야만 트라우마는 극복된다. “이야기하는 행동이 결론에 다다랐을 때, 외상 경험은 진정한 과거가 된다. 이 시점에서 생존자는 현재의 삶을 일으켜 세우고, 미래의 열망을 추구하는 과제와 마주하게 된다.”(주디스 하먼, ‘트라우마’ , 325쪽.)라고 했다. ‘골아보카’는 그런 이야기하기를 통한 치유의 움직임으로, 육지 사는 제주 사람뿐만 아니라 전국 팔도 다양한 사람들이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고통을 치유하고, 평화와 인권이라는 미래의 열망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책의 구성을 보면 맨 먼저 4·3문학회 회원들이 풀어 놓는 특집 기획 ‘제주4·3과 나’가 있다. 그들은 제주4·3이라는 벅찬 역사적 사건을 마주 대할 결심을 하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들의 삶 속에 그려내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와 단편 동화, 에세이, 기행문 등의 문학 작품이 실렸다. 여기에 4·3문학회에서 함께 읽고 토론한 내용을 담은 ‘리뷰’ 섹션, 장편 서사시 ‘한라산’으로 4·3을 알리다 고초를 겪은 이산하 인터뷰, 제주4·3 희생자 유족인 문광호 선생이 들려주는 슬픈 가족사 이야기가 실렸다. 부록으로는 제주4.3과 역사 왜곡을 다룬 ‘4·3 역사 콘서트’ 현장, 고(故) 장동석 선생의 ‘수난의 족청 시절’이라는 수기 등이 실렸다. 


문집에서 이광용은 “봄꽃처럼 피던 겨울날 붉은 동백꽃들이 / 느닷없이 빨갱이 이름 붙여져 목 떨어지고 / 영문 모르고 혼자 살아남은 어린아이가 / 백발이 되어 맞이하는 봄이 / 우리가 만나는 봄과 같은 줄 알았던가”(‘동백이 찾아가다 잃어버린 봄’)라고 노래하고 있다. 살아남은 어린아이가 백발을 맞이하며 맞는 봄의 설움이 있다. 그리고 양경인은 제주4·3을 대표하는 화가 강요배의 ‘바람’ 시리즈를 비평하는데, 삭풍에 쓸려 기울어진 제주의 팽나무 그림을 두고 “바람에 저항하며 살아낸 제주 사람의 모습”이라 평한다. ‘속솜허라’에서 ‘골아보카’를 선언하는 4·3문학회 문집은 새로운 바람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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