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신뢰와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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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에 베트남 여행에서 인상에 각인되어 있는 두 개의 풍경이 있다. 하나는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행렬이고, 두 번째는 그 무더운 날씨에도 호치민묘를 참배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시민들의 행렬이었다.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들은 충돌함이 없이 질서 정연하였고, 거기에 탄 사람들의 표정은 발랄하였다.

그리고 미라로 보존되어 있는 한 시신의 무덤을 돌아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 나라의 자존심을 보았다.

그 나라는 우리와 같이 남과 북으로 분단, 오랜 전쟁의 시련을 마치고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분단국가의 시민으로서는 감회가 많았다. 더구나 그 나라가 전쟁을 치르던 시기에 한때 우리와는 적대관계에 있었다는 점에서 생각은 복잡했다.

그런데 그들은 한국사람을 좋아한다고 한다.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베트남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대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긴 전쟁이 끝난 다음에 승자로서 아량을 갖고 한때 적이었던 월남인을 포용했다는 것이다.

그 화해의 풍성한 너그러움은 아마 그들의 자존심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분열된 국론을 통일하고 계층과 계층,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파당과 분열은 청산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과거는 정치논리에 의해 북과 남, 동과 서로 나뉘었고, 좀 허리를 펴서 살 만하면서 가진 자와 가난한 자, 노와 사, 소위 민주세력과 반민주세력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러한 분당과 파당의 양상은 다양하게 변모하면서 사회 기층까지 만연하고 있다.
이제는 그 갈등이 가족 구성원과 학교에까지 전염되고 있다.

아내와 남편이, 부모와 자식이 화해하지 못하고 교장과 교사가, 교사들끼리도 교총과 교원노조가, 그래서 교육행정당국과 일선 학교가, 학부모와 학교가, 교사와 학생이 서로 불신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뿐인가. 정치집단끼리도, 여당에서도 개혁파와 반개혁파가, 야당에서는 개혁대상자와 개혁주체세력이, 예술계에서는 입에 올릴 수 없을만큼 수많은 파당이 도사리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갈등이 더 큰 울타리 안에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통일세력과 반통일세력으로 나뉘면서 국론이 분열되더니, 급기야는 세대론으로 번져 기성세대와 신세대로 편을 가르면서 과거를 깡그리 무시하고 미래를 만들겠다는 당찬 논리가 이 세대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갈등은 광주 5월 18일에 폭발되었다. 그 일이 우발적인 사건이라 하더라도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대통령의 앞길을 막았다거나 정치인을 매도하는 구호가 남발했다거나 하는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우리의 가슴에 응어리진 상대에 대한 불신과 증오감이 치유될 수 없을만큼 심각하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순수해야 한다.

더구나 그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자격으로 나서게 된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영령들의 묘소를 참배하는 데 무슨 자격이 따로 있겠는가.

누가 그 참배를 막을 것인가. 그 당시 총과 칼을 들었던 사람들까지도 그 외롭고 장렬히 죽어간 영혼들 앞에 참배할 수 있는 것이,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이다.

그들의 죽음이 민주화를 위한 것일진대, 그 민주화는 진정한 화해와 협력
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세력 다툼이나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타인을 정죄하는 발상으로는 안 된다.

마음은 바르지 않는데, 들뜬 명분론에 집착하여 불신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모든 일은 이제 끝나야 한다. 그들의 죽음으로 이 땅에 수없이 되풀이되었던 불신과 갈등으로 인한 살육이 끝나야 한다.

그것은 영령들의 소원이고, 소리 없는 외침일 것이다.
새 정부는 우리 사회에 가득 차 넘치는 이 불신과 갈등을 극복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모든 일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우선 그 일에 목표를 둬야 한다.

그렇다고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이 아니라 ‘가치있는 원칙’에 의해 모든 국정과 사회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 사람들은 서로 신뢰함으로써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

그 신뢰와 화해 위에서 남과 북의 화합도 가능할 것이다. 하노이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신뢰와 화해의 상징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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