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과 너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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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좋아하지만 멀리 떨어져 살아 연락이 잦지 않은 친구에게 오랜만에 전화했을 때였다.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해서 무슨 일인가 했다.

친구는 평소에 신장병으로 앓는 남편에게 자신의 신장을 하나 떼어 주느라 수술을 받은 것이었다. ‘살신성인’이라는 말은 이런 때 하는 것이로구나 생각하면서, ‘너 참 어려운 일 했다’고 하니 친구는 ‘별거 아니야, 그런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다 하게 되’라는 대답이었다.

그래도 내 신장 잘라서 꺼내는 것이 무섭고 수술 후에 찾아올 지옥 같은 통증이 끔찍해서라도 나는 좀 망설여질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런 것은 남편만 살릴 수 있다면 감수할 만한 일이며, 많은 부부들이 그렇게 하고 있고, 부부간에 장기를 주고받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부부와 대신 주고받는 방식을 쓰는데, 그나마 자기는 직접 남편에게 줄 수 있어서 아주 다행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 어쨌거나 장하다. 존경한다. 제발 몸 조리 잘해라’ 하면서 전화는 끊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친구가 안타깝고 그 남편이 좀 원망스러웠다. ‘결혼 전부터 아팠다는 사람이 결혼 후에도 언제나 아파서 내 친구를 전용 간호사처럼 살게 하고, 그나마 모자라서 신장까지 떼어서 가지고... 그러고도 오래 살지 못해봐라, 내가 가만 두나.’ 흥분해서 중얼거리다가 그런 나 자신이 얼마나 유치한가 반성하였다.

수 년 전 가족들이 환자와 결혼해서 되겠느냐고 그렇게 반대하던 결혼을 감행했을 때 이미 친구는 그 남자의 병과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치 병을 d나고 있는 사살과 결혼 할 때는 그 병과 더불어서 그와 함께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 더 행복할 것으로 보였으며, 일단 자신이 선택한 일에 따르는 책임과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친구는 보다 넓게 삶을 보고 이해하는 능력을 얻었을 것 같았다. 아픔을 통해 오히려 삶을 더 깊숙하게 느끼며 살게 된 성숙한 친구, 그런 친구를 둔 것도 내 복이다 하는 마음으로 돌아왔다.

요즘은 ‘내가 사고로 죽을 경우 나의 중요한 장기를 아픈 사람들에게 주라’는 내용의 장기 기증 카드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제자들의 공부를 위해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미리 수속을 해놓는 의과대학 교수들의 이야기도 사람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네가 갑자기 죽을 경우 몸의 일부를 떼어서 아픈 사람에게 주겠는가’ 하는 질문에는 선뜻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도 다수지만,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거절하는 사람도 많다. 우선은 장기 기증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아서 결심이 서지 않기도 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죽은 후에라도 내 몸을 다른 사람들이 찢고 가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서 망설인다.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도 내 몸을 함부로 못할 것 같다는 젊은이도 있고, 반대로 부모님의 유해를 잘 모셔야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이며, 더 나아가 대대로 자손들이 복을 받을 것인데 어떻게 그 시신을 해부하도록 하겠는가 하는 반응도 나온다.

삶과 죽음이 서로 엮여있는 길을 우리는 날마다 걸어서 지나다닌다. 봄날 나무 가지에 돋아난 잎새는 윤기를 띄다가 가을 바람이 불면 떨어져서 어디로 인가 굴러가고, 삶의 나무에는 또 새로이 잎사귀들이 달린다. 다른 잎사귀를 갉아먹는 벌레로 살수도 있고, 아예 삶의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며 파괴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도 있으며, 그 반대로 소중하게 돌보며 가꾸는 수고를 택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삶인 것 같다. 줄 수 있는 것을 모두 삶에 주고 가던가, 고스란히 무덤으로 안고 가서 썩히던가 선택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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