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사는 삶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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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 공휴일이 턱없이 줄어든 탓에 새해 흥이 절로 사라지더라는 얘기를 듣곤 한다. 어디 가족들과 보내는 단란한 시간을 빼앗겨서 그러겠는가.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근면의 상징 한국인인데 해가 바뀌어도 좀체 흥이 살아나지 않는 것은 필경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 속에서 자라난 삶의 번민이 생존의 터널에 자욱해진 탓이다. 그래서일까. 일하기 위해 휴식하는 인생은 행복한 삶이고 휴식하기 위해 일하는 것은 그 반대라는 경구가 여느 때보다 가슴을 때린다. 돌이켜볼 때 언제고 어려움이 없었을까마는 새해가 온 만큼 올해는 꼭 삶에 작은 변화라도 있어야겠다.

과연 어떻게 해야 활력이 사라진 삶에 변화를 부를까. 변화가 온다면 과연 언제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무리 궁리해도 막연하기 짝이 없다. 더러는 정치의 실종을 탓하고, 더러는 대기업의 횡포를 탓하기도 한다. 하기야 탓을 하기 시작하자면 누군들 무엇인들 탓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 해결책이 못된다. 궁극적 해결책이라면 마땅히 정교일치의 파라다이스로 되돌아가거나 혹은 인류의 해방을 보장한 사회주의 유령을 모두가 다시 모시는 것이다. 그것이 아닌 바에 어떻게 모두가 꼭 같이 행복에 나아가겠는가. 이 점에서 행복이란 최소한 사람노릇하며 사는 일에 그칠 수밖에 없음이 자명해진다.

문제는 사람노릇하며 사는 이 최소의 행복이 잘 안 된다는 현실이다. 사람노릇이 무엇인가. 자신의 장기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수입을 얻어 부모님 제철 속옷 사드리고, 결혼해 자식 낳아 기르며 집을 마련하고, 사돈집에 이불 한 채 보내고, 그리고 진심어린 은혜 주신 분에게 자기 분에 맞는 조그만 선물 드리는 것 아닌가. 그렇다. 원래 행복이란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에서 비롯하여 인륜의 실천 속에서 정서적 감동의 승화를 얻는 것이다. 인륜의 도리를 누구나 바라고 바라건대 세계는 이미 너무 불리한 환경이라고들 아우성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내핍을 달게 견디며 정서적 감동을 도모하는 정공법으로 직접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사회안전망을 기다리기 보다는 이웃과의 나눔을 일상화하고 내면으로부터 약자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켜야 한다. 과거보다는 현재적 삶, 현재적 조건보다는 미래의 전망을 꿈꾸며 삶의 자세를 바꿔야한다. 어려울수록 인간성이 드러난다고 했다. 물질적으로는 다소 부족하더라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위치에서 자식은 자식의 위치에서 성실한 삶의 자세로 감동을 주어야 한다. 또한 사회의 지도층은 지도층의 위치에서 약자는 약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고 그간 원하지 않는 가운데 몸과 마음 여기저기에서 자라난 위선이나 체면 따위는 이제 떨쳐야 한다. 새해가 어느 해인가. 광복의 날은 비록 뜻밖에 찾아 왔지만 온 민족이 하나 되어 내핍을 견딘 끝에 비굴과 억압을 과감히 떨쳐낸 을유년(乙酉年)이 아닌가.

올해는 전쟁으로부터 평화를 되찾은 광복의 해이다. 따라서 어려운 경제를 분식시키는 욕망의 기제로서 민족주의가 국가의 묵인 하에 과도하게 팽창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파고가 어느 때보다도 높아질 것이라는 점을 직시하면 그 대안이 곧 배타적 민족주의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다. 공존하는 공동의 선(善)이 무너질 때 사회의 위기가 최고조에 이른다는 점을 되새기며, 각자의 올바른 위치에 서서 나라 안팎으로 강화되어가는 민족주의의 긴장을 평화로운 길로 이끌고 동시에 주변의 약자를 나의 삶에 품는다면 올해야말로 모두가 바라는 대로 충실한 삶을 내딛는 원년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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