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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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기회자 장삼십, 기분자 장오십(棄灰者 丈三十, 棄糞者 丈五十)”이라 했다.

즉 재를 버리는 자는 곤장 30대, 똥을 버리는 자는 곤장이 50대라는 말이다.

곤장이 50이면 거의 죽는다.

그만큼 똥과 재는 소중한 거름 자원이니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골학교를 다녔던 나는 농업시간이면 으레 학교변소에서 똥을 퍼 다가 실습지에 뿌리는 일을 하는 것으로 알았다.

▲“독립운동가 김좌진장군의 아들인 김두한의원은 탑골공원 변소에서 퍼 온 똥물을 국무총리와 부총리, 장관들을 향해 뿌리면서 삼성재벌의 사카린밀수를 규탄했습니다.”

중학교선생님은 수업을 하다말고 마치 그 현장을 보고 온 듯이 열변을 토했다.

열 서너 살 된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총천연색 똥으로 범벅이 된 그 광경을 상상하기에 바빴다.

“이 맛을 보아라, 이게 사카린 맛이다.”

똥물을 씌우며 그렇게 외쳤다는 말에 아이들은 교실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렀다.

TV로 생중계되던 유신체제의 행사장에서 분연히 여성 노동자들이 일어섰다.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노동권을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똥을 끼얹고 얼굴에 문지른 동일방직의 만행을 고발하는 몸부림이었다. 생방송은 즉각 중단 됐다.

공권력이 달려들어 행사장에서 끌어냈다.

청계천변 허름한 술집에 모여 앉은 대학생 서너 명은 입과 귀로 전해지는 그 똥의 진상을 들으며 안주도 없이 쓴 술 만 들이켰다.

▲이제 똥물의 추억은 끝이 났는가 했는데,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신세대 후배들이 이어가고 있다.

똥을 먹인 중대장 대위나 똥을 먹은 200여명의 훈련병들은 서로 같은 20대들이다.

어둡고 어려웠던 시절, 똥물의 추억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같은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똥을 먹일 수 는 없었을 것이다.

출판.미술.영화등 우리 대중문화 전반에 몰아친 말초적인 ‘똥 붐’이 가져다 준 현상인가.

세상이 온통 똥, 똥, 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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