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수눌음, 지역통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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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퍼센트 사람이 80퍼센트 재화를 나눠먹고, 나머지 80퍼센트 사람이 20퍼센트 재화로 먹고사는 사회는 그리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20대80 사회를 넘어 10대90 사회로 치닫고 있다. 지금처럼 한쪽엔 넘치고 다른 한쪽엔 메마른 사회라면 동맥경화증 사회라 할 수 있다. 반면에 건강한 사회로 되려면 재화가 순조롭게 순환되어야 하고, 일거리가 막힘없이 소통되어야 한다.

그런데 창고에는 물건이 쌓였지만 그것을 소비할 사람이 없고, 일할 사람은 넘쳐나지만 써줄 데가 없다.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들은 가게문을 닫고, 대학생들은 취업이 안 되어 졸업을 연기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고 이 위기가 해소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극단적인 이윤추구와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기업이나 국가가 나서서 이 위기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릴 수도 없다. 따라서 이제는 개인들 스스로 나서서 먹고살 자구책을 모색해야 할 듯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어떤 재화나 서비스도 현금화될 수 없다면 더 이상 가치가 없다. 때문에 그 어떤 물건이나 인간도 상품적 가치가 없으면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폐기된다. 하여 팔리지 않는 재화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은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재화가 팔리지 않았던 것은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취업하지 못한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자본의 이익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재화는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제공될 때 그것의 가치가 극대화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그것이 식탁 위에 있을 때는 귀한 음식이지만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순간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고 만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불필요한 사람은 없다. 단지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지 못 했기에 실업자가 됐을 뿐이다. 따라서 환경문제와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재화와 사람을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해줌으로써 그들의 가치를 극대화시킬 필요가 있다.

1980년대초 캐나다의 린턴(M. Linton)이 경제불황으로 농촌공동체가 심하게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현금 없이도 재화와 서비스를 거래할 수 있는 지역통화시스템, 이른바 ‘레츠(LETS)’를 고안했다. ‘레츠’ 회원들은 소식지나 인터넷을 통해서 각자 제공할 수 있거나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현금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들끼리 물품과 서비스를 주고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1996년 ‘녹색평론’에서 지역통화를 소개한 이후로 30여 곳에서 지역통화가 운영되고 있고, 특히 2000년에 창립된 대전지역 품앗이 ‘한밭레츠’가 비교적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도 지난해부터 몇몇이 모여 제주지역 품앗이 ‘수눌음’을 실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역통화는 물품과 사람을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도록 해줌으로써 귀한 존재들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지역통화운동은 각각의 재화들을 필요한 곳에 제공해주고, 각각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폐기물이 없고 실업자가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운동이다. 예로부터 제주도에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가 필요할 때 일손을 주고받는 ‘수눌음’ 전통이 있었다. 수눌음 전통이 옛 제주 농경사회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이라면, 지역통화는 그것을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확대 적용한 것이다.

명실상부한 평화의 섬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상적 삶 속에서 상생과 공생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하고, 모든 인간이 존귀한 존재로 대우받는 게 보장되어야 한다. 오늘날 제주지역에서 ‘지역통화’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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