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관음사를 탐방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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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이 내리쬐던 4월 마지막 주에 학생들과 한라산 관음사를 탐방했다. 예전에도 관음사는 몇 번인가 방문한 적이 있지만, 막상 경내로 발을 들여놓으며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저 막연하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뿐이었다.

관음사는 제주도의 전통사찰 중의 하나로, 평소 부처님의 큰 뜻과 가르침에 귀의(歸依)하고자 하는 불자(佛子)들 뿐만 아니라, 한라산과 그 주변의 관광지를 찾는 도민들이나 관광객들도 한번쯤은 방문하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학생들과 관음사를 탐방한 날에도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삼삼오오 경내로 발을 들여놓는 손님들이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관음사는 정말 경내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안겨주었다. 내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탓일까, 그 동안 많이 바뀐 경내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여기저기를 살피는 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모처럼 학생들과 관음사를 답사한 이유는 실내에서 학습했던 사찰의 입지와 경관 구조적 특성에 대해 좀더 확실하게 뇌리 속에 담아두기 위해서였다. 비록 텍스트를 통해 학습한 사찰은 한국 내에서도 3대 사찰로 통하는 통도사, 해인사 및 송광사였지만, 한라산 관음사를 사례로 하더라도 얼마든지 사찰의 입지와 경관 구조적 특성에 대해 학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관음사에 발을 내딛고 생각해보니, 제주도에는 오랜 역사를 두고 이어져 내려온 대형사찰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다소 허전했다. 사실, 필자는 가끔 역사가 오랜 육지부의 큰 사찰을 찾을 때마다 스스로 불만을 느끼곤 했었다. 아무리 육지부와 동떨어진 유배의 섬, 제주도라 하더라도 불교가 전래된 것은 적어도 고려시대의 어느 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이형상 목사 시절에는 민간신앙을 타파하기 위해 많은 신당(神堂)을 불태우고 사찰을 훼손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최소한도 역사적 전통의 맥을 이어온 한두 개의 사찰 정도는 온전하게 남을 수 없었을까 하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쉽게 의문점은 사라지질 않는다. 어쩌면, 제주도 불교문화의 성쇠는 원래부터 강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신당문화와 연관하여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튼, 한라산 관음사는 제주도의 전통사찰로 조계종 제23교구의 본사로서 30개의 말사(末寺)를 관장할 정도로 중요한 지위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찰의 규모나 입지적인 측면에서도 제주도 내의 다른 사찰과는 많이 비교되는 지위에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음사의 창건 당시나 지금의 모습을 토대로, 육지부의 전통적인 대형사찰과 견줄 수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필자는 사찰내의 다양한 전각이나 부속시설(탑, 연수시설 및 요사체 등) 등은 반드시 어떤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한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의 도량을 닦으며 세월의 연륜을 쌓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탄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최근 관음사의 경내에 이전에 없었던 많은 전각과 다양한 연수시설, 탑과 요사체 등이 들어서는 배경은 관음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몇 백년이 지난 후, 제주도에도 지금의 관음사보다 훨씬 더 넓고 다양한 용도의 전각과 시설들을 갖춘 대형 전통사찰로 성장하게 된다면, 필자처럼 육지부의 큰 사찰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옹졸한 마음을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자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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