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소식
<길 따라 오름 따라 073> 새해 첫날에 - 큰물메
 김승태
 2009-12-24 19:29:09  |   조회: 6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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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다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늘 이맘때면 다사다난과 송구영신을 떠올리게 된다. 기축년(己丑年) 한해를 돌아보면서 감동과 환희, 아쉬움들을 기억 저편으로 보내야 할 시점이다. 제주일보(2009. 12. 18.)는 제주 사회의 2009년 한해 마무리를,

제주사회는 희망과 환희, 갈등과 마찰로 점철된 격변의 한 해였다.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은 결국 사상 초유의 도지사 주민소환투표로 이어졌다. 여기에 신종플루 확산으로 도민들은 불안에 떨었으며, 잇따라 터진 공직자 비리는 도민들을 분노케 했다. 또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도민 사회는 애도의 물결을 이뤘다.

이 같은 고통과 좌절, 슬픔 속에서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개최와 세계자연보전총회 유치는 제주인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관광객 600만 명 시대 개막, ‘제주의 아들’ 양용은 선수의 아시아인 최초 美 PGA 메이저대회 우승은 도민들에게 큰 기쁨과 희망으로 다가왔다. 다사다난했던 2009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도민 사회의 갈등과 마찰은 여전히 남아 다가오는 2010년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제 2009년은 지는 해와 더불어 기억 속으로 남겨두고, 희망의 2010년을 맞이할 시점이다. 제주의 새해 첫해는 최근 몇 년 동안 구름 때문에 제대로운 일출을 볼 수 없었다. 2010 경인년(庚寅年) 첫날 첫해는 희망을 안고 하늘로 향해 불끈 솟아오르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큰물메에서 맞이해보자.

큰물메(큰물뫼 큰물미 물미오름 大水山峰, 성산읍 고성리 2,039번지, 표고 137.3m, 비고 97m)는는 일주도로(1132번)변의 신양교차로(1132번 도로와 1119번 도로가 만나는 고성사거리에서는 1.4㎞임)에서 한라산 쪽 400m 지점 오른쪽의 길을 따라 300m를 가면 기슭(주차장/산책로 안내판)에 도착할 수 있다.

예전에 이 오름에 물이 솟아나 못을 이뤘음에 연유하여 물+메(뫼, 미)라 불려지다가 동쪽에 있는 족은물메와 견주어 대소(大小) 개념을 끌어들여 이를 큰물메(뫼, 미), 대수산봉(大水山峰)이라 하고 있다. 성산읍 고성리, 수산리, 온평리에 걸쳐 있는 오름으로 도로에서 보면 소나무와 삼나무가 무성하나 산책로 또는 공동묘지에 연한 등정로를 따라가면 쉬 정상에 이를 수 있다. 정상에 가면 딴 세상이다. 얕게 파인 굼부리가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찾는 이들을 감격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눈 아래 펼쳐진 섭지코지~일출봉~우도~바우오름~지미봉으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이다. 󰡐이런 곳이 또 있을까?󰡑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기슭에서 정상까지 산책로(계단, 타이어매트 등)가 잘 다져졌고 정상부에는 체력단련을 위한 기구들도 마련해 놓았다. 정상으로 연한 지점에 이동통신기지국이 있고 경방초소(무인카메라)도 세워져 있으며 여러 기의 묘들도 자리하고 있다.

이 오름 일대는 고려 시대 때 본격적인 목마장(牧馬場)의 발상지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제주도가 방목의 최적지임을 탐낸 원나라의 마정(馬政)에 의해 비롯된 것인데 여몽(麗蒙) 연합군에 의해 삼별초가 평정된 후 섬을 점령, 지배하기 시작한 원나라가 1276년에 몽골 말 160여 마리를 이 오름 일대에서 목양(牧養)함에 연유하고 있다.

조선 시대 때는 정상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북동쪽으로 성산리의 성산봉수(城山烽燧), 남서쪽으로는 신산리의 독자봉수(獨子烽燧)와 교신했었다고 전해진다. 정상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삼각점도 있다. 그리고 남동쪽 기슭에는 군위 오씨(軍威吳氏) 제주 입도조 오석현(吳碩賢)의 영역(瑩域)이 마련되어 있으며, 북동쪽 등성이에는 포제단이 있다.
2009-12-24 19: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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