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소식
걸어서 제주 속으로 3(신산~한남)
 김승태
 2010-05-19 20:06:43  |   조회: 6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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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꽃샘추위로 제주섬은 꽁꽁 얼어붙었다. 보도에 의하면, 한라산 진달래밭에 60cm의 기록적인 폭설이 쏟아졌는가 하면 서귀포시에도 4.3cm의 눈이 내렸다. 내린 눈이 얼어붙어 출근길 교통은 대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불규칙한 날씨는 한주 내내 이어지다 토요일에 화창하게 개었다.

‘걸어서 제주 속으로 3’의 제3일째인 3월 14일 08:00 하나로마트에 모여 번영로에 들어서니 짙은 안개(濃霧)는 차량 이동에 장애를 주었다. 어렵사리 출발지인 신산리입구에 도착했다. 자욱한 안개는 출발 후 1시간 여까지 끼었는데 그 속을 거닒, 그 기분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제주도지(2006)’에서는 중산간도로를,
“이 도로가 개설, 포장됨으로써 중산간 지역의 황무지 벌판이 축산용 목장으로 대대적 개발이 시작되어 1970년대엔 우리 나라 축산 기지로 정부가 적극적 정책을 펴 대기업들로 하여금 목장 조성에 참여토록 함으로써 한진그룹의 제동목장/건영목장, 남영나일론의 남영목장 등이 만들어져 한때 활발한 축산 산업이 이루어졌다. (중략) 이 도로 개설로 인해 중산간 지역에 부동산 투기 바람이 일어 재벌그룹이나 투기꾼들이 몰려들어 대단위로 땅을 사들이기 시작, 제주인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가 팔려나갔고 부동산업자들은 땅을 보지도 않은 채 매매를 하여 큰돈을 벌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산리 입구(통오름/독자봉)에서 출발하여 한남리 삼거리까지는 7시간 13분(점심 포함)이 소요되었으며 주거리 25.1km, 보조거리 1.5km를 포함해 모두 26.6km였는데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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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산리입구/통오름(08:54) - 일출랜드입구/삼달1리(09:11) - 삼달리체육공원(09:44) - 성읍사거리/성읍민속마을회관(10:19) - 해양경찰청제주수련원입구(11:17) - 가시리사거리(11:52) - 청주한씨입도조묘(12:03) - 가시리사무소/안재우동상/점심(12:10) - 면암최익현선생유적비(12:54) - 토산1리사무소(13:36) - 표선면/남원읍경계(13:45) - 신흥2리사무소(14:04) - 수망리사무소/남조로*중산간도로교차점(15:12) - 의귀리사거리/의귀초등교/의귀리사무소(15:42) - 한남리사무소(16:04) - 한남리삼거리(16:07)

-- 주요 역사의 현장
0 삼달리:구전에 의하면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 가까이에 있는 더러물내(川)의 형상이 누워 있는 강과 같다 하여 와강이(臥江理)라 부르던 것이 변형되어 『와갱이』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양반이 사는 마을 이름으로 『와강이』는 적합하지 못하다 하여 『삼달리』로 바꾸었다. 이는 사람이 통달(通達)해야 할 세 덕목으로 첫째 규율이 중요하고, 둘째 웃어른을 섬겨야 하고, 셋째 세상에 보은하고 백성을 위하는 것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 참조:마을 홈페이지

0 본지오름:이 오름에 본지낭(노박덩굴의 제주어)이 많이 자라남에 연유하여 본지오름, 이를 한자로 본지악(本地岳)이라 표기하고 있음

0 성읍리:약 650년 전에 거천리에 설촌한 데 이어 <소진리․영전리․화원리․진사리 등 다섯 개의 자연 마을이 형성되었고 <진사리>를 거점으로 하여 한 마을로 통합되었는데, 서기 1423년 정의현청이 지금의 성산읍「고성리」에서 이설되면서「성읍리」로 바꾸었으며, 1606년 동서방리제 실시로 인해 정의현 좌면에 소속되었다가 1914년 면 경계 재확정으로 인해 표선면에 편입되었는데, 정의현청이 있는 성안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이 마을은 1984년 6월 7일자로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었는데, 유서 깊은 옛 도읍의 정취와 유물 유산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성읍민속마을 한복판에는 이른바 천년수(千年樹)로 이름난 느티나무와 그 주변의 헌칠한 팽나무들과 정의현청이었던 일관헌(日觀軒)이 눈길을 끈다. (이 느티나무와 팽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일관헌은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각각 지정, 보호하고 있다. - 참조:마을 홈페이지

0 가시리:가시리지 ‘가스름’(1988)에서는, 1200년 경에 자의(諮議)라는 벼슬에 있었던 변씨(邊氏)란 사람이 병곳오름 주위 <와개(瓦蓋)우연> 일대에 정착하여 안좌리(安坐里)를 설촌한 것이 가시리의 설촌 근간이라 기술하고 있다. 한편, 4․3사건으로 인하여 온 부락이 잿더미로 폐허가 되어 해안 마을로 피난했다가 4․3사건이 진압되면서 피난지에서 복귀한 주민들이 마을을 재건하였음

0 토산1리:약 1000년 전 토산봉 서쪽에 탐라 시조의 하나인 제주 부씨(濟州夫氏)가 이주한 것이 설촌의 시초인데 1300년(충렬왕 26년) 무렵에 제주도에 동서 도현제가 실시될 당시 <절려왓>에 행정관서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번성하니 이 마을 설촌터가 되는데 <절려가름>은 이에서 연유한다. 마을 이름을 처음에는 토산리(土山里)라고 했다가 그후 광산 김씨가 고성리에서 , 경주 김씨가 의귀리에서 이주하여 큰 마을을 이루니 약 150여 년 전에 풍수지리설에 의거, 이 지역의 지형지세가 옥토망월(玉兎望月)이라 하여 토산리(兎山里)로 바꿔 부르게 되고 지금의 토산 1리 전신이다. 토산 2리는 약 500년 전에 순흥 안씨가 가시리에서, 광산 김씨가 토산 1리에서 이주한 게 시초가 되어 많은 이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뤘다. 1943년 일제 강점기 시절에 행정구역을 재편하면서 토산 1구, 토산 2구로 분리되었고 1948년에 행정리 토산1리․토산2리로 바꾼 것이 지금에 이르는데 지역주민들은 <알토산․웃토산> 등으로 부른다. - 참조:마을 홈페이지

0 신흥2리:신흥 2리의 옛 이름은 <온천동(溫泉洞)․여호내․여우내>이다. 1706년(숙종 32년) 설촌 당시부터 지금의 신흥 2리를 <여호내>와 <온천동>으로 불러왔다. 이는 마을 안에 샘이 없어 봉천수를 주로 식수로 사용한 데서 미지근한 물을 먹는 마을이라 하여 <온천동>이라 했으며, 이 지역의 지형지세가 마치 여우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여호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902년 이 마을의 여러 동네가 번창하라는 뜻에서 신흥리로 바꿔 부르게 되었고 이후 1961년 8월에 1리와 2리로 분할하여 오늘에 이른다. - 참조:마을 홈페이지

0 수망리: 수망리는 예전에 <물우라․무라>라 칭했는데 이는 약 550여 년 전에 설촌할 당시 이 마을의 높은 곳에 물이 있다 하여 연유한 이름이다. 높은 곳에 물이 있다 함은 물영아리 즉 수령악의 분화구를 두고 한 말이다. 서기 1915년 일제 강점기에 도사제(島司制)를 실시하면서 행정구역을 개편했는데, 이 때수망리로 마을 이름을 바꿨다. 이름을 바꾼 연유가, 마을이 높은 지대에 자리 잡으니 전망이 좋다는 뜻에서, 또 다른 설은 물영아리의 용줄기를 타고 설촌되었다는 풍수설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 참조:마을 홈페이지

0 의귀리:1600년(선조 33년) 임진왜란 당시 경주 김씨 만일이 국난의 어려움을 인식하여 병마 500필, 1659년 이후 그의 아들 대길이 매년 500여 필의 병마를 조정에 헌납했고 1724년 제주에 기근이 드니 대길의 손자 남헌이 비축미 1,340석을 풀어 구휼하니 그 공을 찬양하여 1752년 영조왕이 비단옷 한 벌을 하사했다. 이에 임금이 하사한 옷을 받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94∼1926년까지 서중면의 소재지로서 행정, 산업,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일제에 의해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당시 수망리와 동의리 일부를 병합하여 의귀리라 이름 짓고 제주군에 편입되었다. - 참조:마을 홈페이지

0 넉시오름:오름의 형국이 넋 나간 소가 누워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넉시오름(넋이오름), 넉시악, 이를 한자로 대역하여 魄(넋 백)+ 犁(얼룩소 리)+岳이라고도 하고 있음

0 한남리:1290년(충렬왕 16년) 석곡리(石谷里)라는 이름으로 설촌, 1864년(고종 2년) 서중면 한남리로 개칭되었다. 4․3사건으로 인해 마을이 폐동되어 남원리(17호), 의귀리(25호) 등지에 살다가 1953년 7월 마을이 재건되므로 다시 복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참조:마을 홈페이지

성읍민속마을을 지날 무렵에 민속마을을 찾은 관광객, 그리고 잠깐이나마 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보니 문득 행복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사전에서는 행복(幸福, Happiness)을 ‘욕구가 만족되어, 부족함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하는 심리적인 상태’라 풀이하고 있다.

행복지수(幸福指數)를 창안한 영국의 심리학자 로스웰(Rothwell)은 행복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자신에게 시간을 쏟을 것, ② 흥미와 취미를 추구할 것, ③ 밀접한 대인관계를 맺을 것, ④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④ 기존의 틀에서 벗어날 것, ⑤ 현재에 몰두하고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 것, ⑥ 운동하고 휴식할 것, ⑦ 항상 최선을 다하되 가능한 목표를 가질 것 등 7가지에 힘쓰도록 강조하고 있다.

법정 스님은 ‘자기답게 사는 것’에서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의 행복은, 나의 행복도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그 그리움은 사랑으로 자라고, 그 사랑은 좋은 인연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한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을 더 깊이 알아 감은 행복’이라고 한다. 걸어서 제주 속으로 빠져들면서 잊혀 지냈던 그리움과 사랑, 인연들을 찾아내는 것만 같고, 그리고 행복도를 높이는 것만 같다.
(2010. 03. 14.)
2010-05-19 20: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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