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소식
걸어서 제주 속으로 4 - 평화로(새별오름 입구~안성교차로)
 김승태
 2010-12-11 10:16:01  |   조회: 5691
첨부이미지
평화로 걷기 제2일째인 11월 28일 09:00경, 출발지인 새별오름 입구에 도착하니 세찬 북서풍은 몸을 움추려들게 할 정도였다. 시원스레 쭉쭉 뻗은 평화로를 바삐 달려가는 차량들, 무엇이 그리 바쁜지 꼬리에 꼬리를 잇는 차량 행렬은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다.

제주도내 도로 중 교통량이 가장 많은(2010년 9월 현재, 1일 평균 2만 481대) 평화로는 원래 중산간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한 1967년부터 서부산업도로(1111호)라고 하다가, 국도로 지정될 때는 제95호선이었으나 제주도가 제주특별자치도가 되면서 지방도 1135호(2006년 9월에 평화로로 지정)로 변경되었다.

다른 도로와의 연장은 1139호(1100도로)선인 오라로터리∼노형삼거리까지의 3km와 1136호(중산간도로)선인 노형삼거리에서 무수천까지의 4,1km 등 7,1km가 중용되고 있다. 일반인들은 평화로를 제주~중문(서귀포시)을 잇는 도로로 착각하기 쉬운데 애월읍 광령에서 출발한 이 도로는 제2산록도로(1115번)와 만나는 광평교차로를 지나 동광IC(제2한창교)에서 대정 방면과 중문 방면으로 갈리게 되는데 대정 방면이 평화로이고 중문 방면의 길은 한림에서 출발한 한창로와 중용된다.

한편, 1967년부터 확장, 보수 공사가 시작된 이래 2002년 월드컵과 맞물리면서 제주시에서 동광IC를 거쳐 서귀포시까지는 4차로 확장되었고, 서광리∼대정읍 안성리 7.0㎞ 구간은 지난 2003년 8월부터 총 428억원을 투입, 2008년 6월에 완료했다. 따라서, 평화로는 다른 도로와 중용되는 구간을 제외하면 용담동에서 보성리까지가 아니라 실제로는 무수천사가로에서 안성교차로까지가 된다.

제2일째는 11월 마지막 일요일인 28일에 새별오름 입구를 출발하여 안성교차로(평화로와 일주도로가 만나는 곳)까지 3시간 27분(간식 포함)이 소요되었으며 주거리 15.5km, 보조거리 0.1km를 포함해 모두 15.6km였는데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

새별오름 입구(09:05) - 제주시*서귀포시 경계(09:30) ~ 캐슬랙스제주CC 입구(09:33) - 광평교차로(09:44) - 감낭오름 기슭(09:54) ~ 동광IC/제2석교동교(10:25) - 밝은오름 기슭(10:38) ~ 서광1교차로/소인국테마파크 입구(11:00) ~ 넙게오름 입구(11:07) ~ 덕수1교차로(11:45) ~ 안성교차로(12:32) / 추사유배지 견학

--- 주요 역사의 현장

0 광평교차로 : 평화로와 제2산록도로(1115번)가 만나는 곳임

0 감낭오름 : 예전에 이 오름에 감나무가 자라났음에 연유하여 감+낭․남(나무의 제주어)+오름, 이를 한자로 감목악(柑木岳), 시목악(柿木岳)이라 하고 있음

0 원물오름 : 조선 시대에 이 오름에서 조금 내려간 동광리 입구에 원(院 : 출장하는 관원들을 위해 각 要路나 인가가 드문 곳에 두었던 國營의 숙식 시설)이 있었음에 연유하여 이 곳의 샘물을 원물이라 했고 그 이름이 오름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다. 또한, 대정원님이 제주목을 다녀오다 이 오름 입구에 있는 물을 마셔 갈증을 해소했다고 하여 원물, 원나라가 목장을 설치하여 그 물을 이용했다고 하여 원수(元水)라고도 명명되었다고 전해짐

0 동광IC(제2한창교) : 제주도내 도로 중 갈림길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서 대정 방면으로는 제1한창교(대정~제주 상행)와 제2한창교(제주~대정 하행)가, 중문 방면으로는 동광교로 각각 갈려나가고, 그 아래는 동광6거리에서 갈려나온 한창로(1116번)가 있음

0 동광리 : 360여 년 전 만수동 지역에 任(임)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룬 후 1670년대에는 마전동(麻田洞) 지역으로 분산 이주하여 취락이 2개소로 나뉘었다. 1700년대에는 '무동이왓(舞童洞)'에도 동네가 형성되었는데 당초에는 자단리(自丹里)에 속했다가 한때는 광청리(廣淸里)로 불린 때도 있었으며 1839년 동광리(東廣里)로 개칭했다. 4·3 사건때 큰 피해를 입고 해변 마을로 분산 이주해 있다가 1953년 때부터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마을 홈페이지에서 옮김 -

0 밝은오름 : 오름의 모양새가 달처럼 환하고 반반하게 생겼다 하여 밝은오름, 벌근(밝은의 제주어)오름, 이를 한자로 명악(明岳)이라 하고 있음

0 서광동/서리 - 서기 1402년(태종2년)에 제주, 대정, 정의 삼군제를 실시할 당시 대정군의 소재지가 서광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훨씬 그 이전으로 보인다. 1917년에는 면사무소가 감산리로 옮겨지고 1930년대에는 차츰 쇠퇴하게 됨. 이 마을들은 당초 자단리로 불리어 오다가 복구후인 1963년 11월 서광동·서리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마을홈페이지에서 옮김 -

0 넙게오름 : 오름의 모양이 넓적한 게처럼 생겼다 하여 넙(넓다의 어간 ‘넓’의 제주어)+게+오름, 이 오름이 위치한 서광리를 예전에 ‘광챙이’란 칭한 데 연유하여 광챙이오름, 이를 한자로 광해악(廣蟹岳)이라 하고 있음

0 안성리 : 2006년 1월 안성리청년회에서 새긴 마을 표석에는,
"우리 마을은 조선 태종 16(1416년)년에 대정현이 설치되었고, 1418년 현감 유신(兪信)에 의하여 대정현성이 축조되면서 마을 이름을 '성안(城內)'으로 불러오다가 차차 성안으로 몰려드는 가구수가 불어남에 따라 1518년 성의 남, 북문을 경계로 동쪽은 동성리(東城里) 서쪽은 서성리(西城里)라 하여 두개 마을로 나누게 되었다. 1879년 동성리를 안성리로 바꾸었으며, 1891년에는 인성리가, 1915년에는 구억리가 각각 분리되어 나갔다.

안성리는 대정현의 설치와 함께 하는 유서 깊은 마을로서 대정향교, 송죽사, 대정서당 등 학문의 전당 등이 자리잡았었고, 동계 정온(鄭蘊)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같은 충신석학(忠臣碩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남긴 학문과 충절의 자취가 살아 숨쉬는 마을이기도 하다."라고 새겨 놓았다.

0 추사유배지 :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곳으로2002년 4월 17일 제주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 10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87호로 지정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마을의 대정읍성 동문자리 바로 안쪽에 있다. 옛 대정현의 돌하르방과 김정희의 글씨 및 그림 복제품을 전시해 놓은 추사기념관이 있고, 김정희가 머물러 살던 초가 4동을 옛 모습대로 복원해놓았다. 김정희는 이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국보 188)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 NAVER 사전에서 옮김 -

다소 차겁게 느껴졌던 바람은 출발 1시간 정도 지나면서 잦아들었고 기온도 높아져 늦봄으로 착각할 정도로 포근해졌다. 자동차로만 달려갔던 그 길을 마냥 걸으면서 사방을 바라보니 길 이름 만큼 모두 평화로워 보였다. 어느 글에, '인생 80 - 걷지 못하면 끝장이고 비참한 인생 종말을 맞게 된다. 걷고 달리는 활동력을 잃는 것은 생명 유지 능력의 마지막 기능을 잃는 것이 아닌가. 걷지 않으면 모든 걸 잃어 버리듯 다리가 무너지면 건강이 무너진다.'란 구절이 시사함을 거울삼아 '많이, 자주, 즐겁게' 걸으려 한다.
(2010. 11. 28.)
2010-12-11 10:16:01
112.164.206.13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