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잉의 ‘창공을 나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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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애틀에는 국제공항을 비롯하여 국내선, 화물전용 비행장, 개인 비행장 등으로 비행장이 수십 군데가 넘는다.

우리가 말하는 시애틀공항은 시애틀과 타코마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실제 공항명칭은 시택(Sea-Tac)국제공항이다.

그 근처 보잉필드에는 보잉사 공장, 전용비행장, 보잉항공우주박물관(보잉사 발상지)이 있다. 시애틀을 상징하는 보잉사는 에버릿, 렌튼 등 시애틀 전역 여러 곳에 공장을 가지고 있다.

시애틀에서 북쪽으로 30마일쯤 달리다보면, 대규모 거대공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보잉사가 자랑하는 에버릿 상용기 라인이다. 단일 건물로선 세계에서 가장 넓다는 항공기 제작공장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주력 제품 역시 하늘을 나는 항공기중 가장 큰 보잉 747기다. 전세계 상용기 시장의 75% 점유율을 감안할 때, 공장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흔히들 꿈은 사람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한다. 하늘이 준 꿈에 헌신하는 사람은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절망하지 않는다.

보잉사를 창업한 윌리엄 에드워드 보잉(1881~1956)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독일계 목재업과 철광산업에 종사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후 서부로 이주하였다.

워싱턴주 소재 그레이스 하버 주위의 산림지대에서 임야매매로 큰 재산을 모은 보잉은 1908년 시애틀로 이주했다. 2년 후, 그는 미국 최초의 항공 쇼를 보기 위해 LA에 도착한다. 항공 쇼를 보고 큰 감명을 받은 보잉은 비행기에 타보고 싶었지만 태워주지 않았다. 이날의 기억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는 이때부터 항공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한다.

시애틀 유니버시티 클럽에서 조지 콘래드 웨스터밸트와의 만남은 보잉이 항공산업에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미해군 기관사인 웨스터밸트는 자신이 MIT에서 습득한 항공학 이론과 그동안 경험한 모든 정보를 보잉에게 전수해 주었다.

1915년 가을, 보잉은 웨스터밸트에게 비행기 설계를 제안한다. 그들은 복엽비행기 만드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스터밸트는 동부로 발령받고 떠난다. 보잉은 혼자 작업을 계속해, 결국 1916년 보트창고에서 이중부력 수상비행기 2대를 제작해 낸다.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B&W라고 이름 지었다.

드디어 첫 비행하는 날, 공교롭게도 조종사가 약속시간에 늦는 바람에 기다리다 지친 보잉은 직접 비행기를 조종한다. 격납고를 찾느라 지각한 조종사가 도착했을 때 보잉의 비행기는 이미 강 건너 상공 위를 날고 있었다.

보잉은 자신의 사업을 일으키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16년 7월 15일, 그의 비행기 제작사업은 ‘퍼시픽항공기제작사’를 창업하게 된다. 그로부터 일년 후 ‘보잉항공사’로 상호를 바꾸면서 새롭게 태어난다.

1917년 당시, 보잉사에는 조종사, 목수, 건축사, 재봉사 등을 포함해 총 28명의 직원이 일했다. 이들의 급여는 시간당 최저 14센트를 받았고, 수석조종사는 한 달에 2~3백 달러를 받기도 했다.

이 무렵 보잉은 B&W 신기종이 잘 팔리지 않자, 자신의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아 회사의 필요경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보잉사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고, 1956년 9월 비행기 추락사고로 타계했다.

보잉사는 세계 70여 개국에 15만6천명의 임직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항공우주업체로 성장했다. 지금 보잉사의 거대한 조립라인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근로자 면면을 보면, “세계의 하늘은 우리가 책임진다”는 진한 자긍심이 묻어난다.

보잉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그 꿈에 헌신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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