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문화와 축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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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보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서양식 결혼식을 올린 사람은 유길준(兪吉濬)의 동생 유성준(兪成濬)이었다고 한다.

그 해가 1907년이었다.

하지만 전통 유학자로써 당시 개화기 인사들의 행태를 사소한 일까지 비판한 매천 황현도 그 결혼식에서 축의금을 받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있다.

전통 결혼식이 많았던 일제시대까지 도시에서는 떡집에 주문해 갖가지 빛깔로 물들인 ‘색떡’을 둥글고 큰 놋그릇인 ‘밥소라’에 30cm 쯤 높이로 쌓아 보냈다.

▲갖가지 색으로 물들인 떡으로 만든 꽃, 새, 노리개 등을 꼬챙이에 꿰어 장식했는데 요즘의 결혼식 케이크만큼이나 화려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내온 ‘색떡’은 대청에 죽 늘어놓아 사람들이 구경하게 했는데, 요즘 화환같은 구실도 했다.

보통 ‘색떡’을 놋 그릇 하나면 큰 부조가 되고 지방에 따라서는 국수 한 채반을 보내면 됐지 돈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부상조의 정신은 예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미풍양속이다.

지금은 상호부조가 많이 사라졌으나 경조사 부조는 아직도 남아있다.

▲결혼식이 일가 친인척 중심으로 치러지던 시절에는 이처럼 부조를 돈으로 하지 않았다.

과거 제주도에서도 쌀이나 술과 떡을 보내거나 장작을 보냈다.

혼주와 가까운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장만하여 보내기도 했다.

이런 결혼식 부조문화가 돈을 주는 것으로 바뀐 것은 광복이후부터가 아닌가 한다.

결혼식 문화가 광복이후 미국의 영향을 받아 점차 호화로워지면서 이상하게 변했다.

혼주의 체면치례와 과시욕 때문에 일반 하객을 끌어 모으는 과정에서 허례허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요즘은 청첩장을 받으면 축의금이라도 전해야 실례를 면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사회다.

예절이란 본래 존경 축하 감사 등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형식일 뿐이다.

이 마음가짐이 내용은 사라지고 그 것을 담았던 껍데기만 남은 꼴이다.

풍속은 ‘상풍하속(上風下俗)’ 한다고 했다.

사회 지도층부터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일수록 하객을 끌어 모으는데 앞장을 서고 있으니 씁쓸한 것이다.

결혼식은 원래 동서고금을 통해 가족 중심이었다.

우리도 다시 그렇게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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