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과 고은
노벨문학상과 고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지난 13일 밤 오후 8시를 전후해 모든 신문.방송사들이 분주했다.

발표가 1주일 연기되면서 시인 고은의 수상 기대와 혹 있을지 모르는 전격 수상 소식에 이미 짜 놓은 판을 바꿔야 하는 일련의 작업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더 없는 영광을 기대하며 스웨덴 한림원 발표소식에 초조감은 더했다.

그러나 결과는 영국작가 해럴드 핀터가 선정되면서 우리나라를 비켜갔다. 후일담이지만 경기도 안성시 마정리 대림동산 장미골 앞 고은씨의 자택에는 100여 명이 취재진이 진을 치고 오후부터 술렁거렸다고 한다. 그만큼 고은씨의 수상 기대감이 컸던 것이다.

▲같은 시각. 제주일보 편집국도 마찬가지 바쁘게 움직였다. 창간호나 신년호 때면 으레 축시를 단골로 보내왔던 시인 고은의 제주 인연 때문이다.

고은은 1963년 서울을 떠나 목포에서 제주행 가야호를 타고 산지포에 내린 후 1967년 상경하기까지의 제주에서의 삶의 궤적을 시집 ‘해변의 운문집’에 남겼다.

1963년 제주시내에 내린 고은은 빈털터리로 친지가 소개한 서부두 여인숙에서 하숙을 정한 뒤 그전에 시인 구상과 자신을 강연에 불러준 제주의 문우들을 만나게 된다. 이후 중산간 지대를 떠도는 한편 화북동에 도서관을 만들어 관장노릇도 하고 금강고등공민학교를 개설해 교장과 국어교사를 하며 빈민아동을 모아 무료수업도 했다.

당시 고은은 한라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구조되기도 하고 계속되는 폭음 등 극적 에피소드와 허무의 기행으로 점철된 시기로 특히 시인은 화북의 별도봉 절벽끝에 앉아 하루종일 참선에 몰두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禾北마을의 갈치배들은 저 바깥바다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희미끄레한 돛을 올려 어른스럽고/ 제 배마다 제 마음을 이루어 바다조차도 마음 하나로 이룬다.…(하략)…" 제주를 떠난 뒤 제주의 그리움을 ‘海軟風’이라는 시를 통해 이처럼 절절히 노래하고 있다.

1967년 서울상경 후 또하나의 제주시편을 모은 시집 ‘제주시집’을 발간하게 되는데 이 시집 발간 후 70년대 유신독재에 맞서는 지식인 투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간사,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경찰서와 정보부의 단골고객으로 유폐-구금-투옥의 험난한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아쉬운 노벨문학상 선정이었지만 올해처럼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문학상에 가까이 간 적은 없었다고 한다. 더 희망적인 것은 고은을 필두로 박경리, 황석영, 신경림, 이호철, 최인훈, 이문열, 조정래 등 쟁쟁한 후보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