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서정(抒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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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하늘아래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이런 날에는 깊어가는 계절의 정취를 확인하고파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굳이 멀리 있는 산이 아니라도 맑고 그윽한 가을풍경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계절에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자연의 테마는 뭐니뭐니해도 단풍과 억새다. 단풍은 울긋불긋 오색빛으로 가을을 채색하고, 억새는 은빛 물결로 계절의 낭만을 담아낸다. 하지만 그 둘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단풍이 화려하고 현란한 데 비해 억새는 수수하고 수더분한 운치를 자아낸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은 억새에서 가을의 황홀한 서정을 더 느낀다고 한다. 나무의 든든함도, 꽃의 화사함도 없지만 하늘과 바람밖에 없는 황량한 땅위에 파도처럼 일렁이는 은빛 물결은 언제 봐도 장관이다.

▲이 가을, 제주의 산과 들은 온통 은빛 세계다. 한라산 들녁과 산굼부리에만 억새가 고운 게 아니다. 산책객들로 붐비는 별도봉 자락에도 억새의 작은 흐느낌을 만끽할 수 있다. 걷기 코스로 이만한 데가 또 어디 있으랴.

게다가 새벽녁 소슬바람에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바스락거리는 억새의 소리는 이곳에서 덤으로 얻는 기쁨이다.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늙으신 부모님의 백발같은 억새 사이를 걷노라면 화려한 계절을 떠나 보내는 애틋한 감상과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 처연한 심정을 함께 맛볼 수 있다.

거친 들판이나 습지를 가리지 않고 끈끈한 생명력을 간직하고 오롯이 피어난 억새. 가을 바람에 파도처럼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견뎌내는 억새는 우리들의 삶을 그대로 담아내며 초연하고 겸손한 삶을 주문하는 것 같아 절로 사색에 빠져들게 한다.

▲실로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그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광만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일과 생활에 필요한 정신적 에너지를 그 속에서 공급받는다. 그리고 자연의 섭리에서 깨닫는 지혜와 덕목들은 더 큰 선물일 것이다.

눈앞에 어른 거리는 은빛 물결은 앞으로 ‘가을의 열병’을 한아름 풀어놓고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이 계절이 다 가기전에 잠시나마 은빛 숨결에 지친 심신을 달래보자. 고단한 일상사에 까닭모를 가슴속 상처가 치유될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 죄다/아파하는 것 죄다/슬퍼하는 것 죄다/바람인 것 죄다/강물인 것 죄다/노을인 것 죄다…/너는 버리고 있구나/흰 머리 물들일 줄도 모르고/ 빈 하늘만 이고 서 있구나/돌아가는 길/내다보고 있구나”(이근배 작 ‘억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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