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의자와 모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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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철. 소설가
지난해에 입적한 법정 스님은 땔감으로 쓰던 참나무 장작으로 의자를 만들고 그것에 ‘빠삐용의 의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화 속 주인공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게 인생을 낭비한 죄 때문이었듯이, 스님도 그 나무 의자 위에 앉아 혹시 자신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깊은 산속의 암자에서 명상과 참선을 하며 홀로 지내신 스님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경계를 해야 하는 마당에, 하물며 우리 같은 속인들이야 시간의 속절없는 흐름 속에서 어찌 마음을 제대로 가다듬을 수 있겠는가. 시간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하고 까다롭기 짝이 없는 대상이다.

우리는 시간에 의해 태어나고 시간에 의해 죽는다. 시간은 우리를 낳고 또 거두는 것이다. 어찌 보면 살아 움직이는 건 시간 자체일 뿐이고, 인간 개개인은 그 시계의 숫자판 위에서 째깍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미세한 바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재는 작은 단위로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래시계 속에 들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한 해가 지날 때마다 365 개의 모래 알갱이를 소모한다. 우리 발밑에서는 끊임없이 모래가 빠져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래가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우리의 생체 시계는 완전히 멎고 만다.

그러나 시간은 그렇게 가차 없고 무자비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은 것만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란 무척 상대적이다. 뇌 의학과 관련된 임상보고서에는 몇 가지 특이한 사례들이 발표되고 있다. 뇌 작동에 이상이 생긴 한 남자는 시간의 흐름을 남들보다 더 빠르게 인식한다고 한다. 때문에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갈 때, 그 찻잔이 입을 향해 달려드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뇌의 해마 조직에 손상을 입은 한 남자의 경우에는 기억이 15분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시간의 역사를 감지하지 못하고 15분이라는 영원한 현재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렇듯 특별한 사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간이 항상 물리적으로 균질하게 흐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뭔가에 몰두하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고통스런 상태에 빠져 있으면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느리게 흐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릴 때 시간의 흐름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달리 말해 우리는 매순간 행복해야 하고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잘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인생은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닐 터이다. 따라서 시간을 항상 너무 빨리 흐르게 하거나 혹은 너무 느리게 흐르게 하는 데 의식적으로 집착해서도 안 될 것이다.

마라톤이나 자전거 경기에서 기준이 되는 속도를 만드는 선수를 페이스 메이커라고 부른다. 인생이라는 경주에서도 오르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이 있다. 우리는 움직이는 시계라고 부르는 페이스 메이커의 감각을 익혀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또 때로는 적절한 리듬으로 흐르게 할 필요가 있다.

며칠 전에 겨울 산행을 하다가 꽝꽝 얼어붙은 폭포를 보았다. 그러나 그 두툼한 얼음 층 안에서는 작은 물줄기가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겨울에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제 곧 날이 풀리고 봄이 오면 얼음이 녹아 거침없이 물이 쏟아져 내리리라. 내 모래시계 속의 모래도 폭포수처럼 빠르게 빠져 나가리라.

그러나 올해에 나는 그 빠른 물살 속에서 멱도 감고 서핑도 하고 래프팅도 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내게 주어진 이 한 해의 시간이라는 재산을 가지고 적절히 소비하고 관리하고 또 투자도 하려 한다. 신년을 맞이하여 어느 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에 문득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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