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죽임을 당한 대신들은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殺生簿)’에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살생부의 첫 장에 오른 대호(大虎) 김종서도 이날 밤 수양대군의 측근인 양정의 칼에 스러졌다.
▲영국 출신의 희극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찰리 채플린도 살생부에 올랐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나치의 악명 높은 반(反)유대인 선동가였던 요한 폰 레어스가 쓴 ‘유대인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책에 채플린이 아인슈타인 등 다른 저명 유대인들과 함께 소개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에 이름이 실렸던 사람들 대부분이 나치에 의해 살해되면서 이 책이 살생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2010년 치러졌던 동시 지방선거에서도 살생부가 회자됐다. 당시 제주도지사 후보로 출마했던 일부 인사들 진영에서 ‘○○○ 후보가 당선되면 도청의 △△△ 등은 중용되고, ◇◇◇는 밀려날 것’이라는 말이 파다했다. 이른바 ‘4년 좌천 살생부’설이 그것이다. 실제 지방자치제가 부활된 후 도지사뿐만 아니라 시장·군수에 당선된 측은 상대 진영에 선 것으로 알려진 공무원에 대해 인사권을 이용해 철저히 응징했다.
이 같은 ‘복수혈전’이 4년마다 반복되면서 공직사회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4·11 총선을 두 달 앞두고 우리 정치권에도 살생부가 횡행하고 있다. ‘원래 선거 때가 되면 늘 그런 문건이 돌게 마련’이라고 애써 자위하지만 해당 인사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도 살생부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은 아니어도 ‘뽑을 사람’과 ‘버릇 고쳐줄 인사’를 가를 기준은 나름대로 정하고 있지 않을까. 오는 4월 11일 밤 누가 승리의 환호성을 울리고, 또 누가 패배의 쓴잔을 마실지를 결정해야 하니까 말이다. 결국 이 살생부는 국민들이 쥔 셈 아닌가.
신정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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