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부(殺生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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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부름인줄로만 알고 궁으로 들어오던 병조판서 조극관이 철퇴를 맞고 무참하게 쓰러졌다. 이어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도 칼을 맞고 불귀의 객이 됐다. 1453년 단종 즉위 원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은 그렇게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당시 죽임을 당한 대신들은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殺生簿)’에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살생부의 첫 장에 오른 대호(大虎) 김종서도 이날 밤 수양대군의 측근인 양정의 칼에 스러졌다.

▲영국 출신의 희극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찰리 채플린도 살생부에 올랐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나치의 악명 높은 반(反)유대인 선동가였던 요한 폰 레어스가 쓴 ‘유대인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책에 채플린이 아인슈타인 등 다른 저명 유대인들과 함께 소개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에 이름이 실렸던 사람들 대부분이 나치에 의해 살해되면서 이 책이 살생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2010년 치러졌던 동시 지방선거에서도 살생부가 회자됐다. 당시 제주도지사 후보로 출마했던 일부 인사들 진영에서 ‘○○○ 후보가 당선되면 도청의 △△△ 등은 중용되고, ◇◇◇는 밀려날 것’이라는 말이 파다했다. 이른바 ‘4년 좌천 살생부’설이 그것이다. 실제 지방자치제가 부활된 후 도지사뿐만 아니라 시장·군수에 당선된 측은 상대 진영에 선 것으로 알려진 공무원에 대해 인사권을 이용해 철저히 응징했다.

이 같은 ‘복수혈전’이 4년마다 반복되면서 공직사회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4·11 총선을 두 달 앞두고 우리 정치권에도 살생부가 횡행하고 있다. ‘원래 선거 때가 되면 늘 그런 문건이 돌게 마련’이라고 애써 자위하지만 해당 인사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도 살생부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은 아니어도 ‘뽑을 사람’과 ‘버릇 고쳐줄 인사’를 가를 기준은 나름대로 정하고 있지 않을까. 오는 4월 11일 밤 누가 승리의 환호성을 울리고, 또 누가 패배의 쓴잔을 마실지를 결정해야 하니까 말이다. 결국 이 살생부는 국민들이 쥔 셈 아닌가.



신정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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