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간(新舊間)’ 풍습의 현대적 의미(하)
‘신구간(新舊間)’ 풍습의 현대적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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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전통적인 세시풍습인 신구간은 조선시대 후기에 간행된 ‘천기대요’와 ‘산림경제’의 세관교승(歲官交承)조에 “대한 후 5일부터 입춘전 2일 사이를 신구세관이 교차하는 때”라고 규정한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이것은 신구간이 묵은철을 정리하고 새철을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논자는 위의 책들이 전국적으로 널리 읽혔는데도 육지부에는 신구간이라는 개념조차 없고 제주도에만 고유한 풍습으로 자리잡은 이유를 기후적인 요인에서 찾고자 한다.

육지부에서는 신구간이 엄동설한이어서 묵은철을 정리하고 새철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삼기에는 부적절하며, 이 시기에 이사를 하거나 집을 수리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입춘이 되어도 영하의 날씨여서 새철이 시작될 수 없다. 기상학적으로 볼 때 일평균기온 5℃ 이상일 때를 봄이라 하는데, 입춘에 일평균기온이 5℃를 넘어서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제주도가 유일하다. 다시 말해서 입춘(立春)에 문자 그대로 새철이 드는 곳은 제주도뿐이다. 따라서 제주도는 세관교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묵은철을 정리하고 새철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인 셈이다.

5℃ 이하에서는 대부분의 효소 작용이 중단되어서 식물성장이 멈추고 세균번식이 위축된다. 신구간은 일년 중 가장 추워서 제주도에서도 일평균기온이 5℃ 이하로 내려간다. 이것은 고온다습한 제주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 기간이 세균번식이 위축되는 유일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역(防疫)이 허술하던 시절에 위생상에 문제가 되어 못했던 일, 즉 집을 수리하고 변소를 개축해도 별 탈이 없었다. 언제나 세균 감염에 시달려야 했던 제주인들에게 신구간은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구간에는 지상에 신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동티가 안 난다는 속신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신구간 풍습은 기후학적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있었기에 더욱 강화된 속신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신의 구속을 받던 제주인들에게 신구간은 신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된 유일한 기간이었다. 다시 말해서 신구간은 신이 두려워 못 했던 일들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자유의 기간이요, 일탈의 기간이었다.

한편 신구간은 제주도의 유일한 농한기이다. 비가 많으면서도, 가뭄과 태풍에 시달려야 했던 제주인들은 식물이 성장할 수 있는 시기에는 농사에 전념해야 했다. 그리고 농사 외적인 일은 농한기인 신구간을 이용해야 했다. 입춘이 되면 곧바로 농사에 전념해야 하는 제주인들에게 신구간은 집안일을 하기에 안성맞춤의 시기였다. 다시 말해서 노동력을 생업에 집중적으로 투여해야 했던 농경사회에서 농한기인 신구간에 집을 수리하고 이사하는 풍습은 합리적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가 되면서 신구간은 곧 이사철로 국한되고 말았다. 지금은 의학의 발달로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과학영농시대가 되면서 농한기가 따로 없다. 따라서 산업사회인 오늘날에도 농경사회의 풍습인 신구간을 그대로 지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계절은 순환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도 새로운 계절을 기운차게 시작하기 위해서 묵은철을 정리하고 새철을 준비하는 기간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신구간을 그동안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못했던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의 시간, 해방의 시간, 일탈의 시간으로 거듭나게 하여 제주에서만 있는 독특한 축제 기간으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신구간엔 제주도에서 미련없이 보내고 새철에는 새출발을 할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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