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그 여행 속에서
쿠바, 그 여행 속에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가영/수필가.논설위원

콜럼버스가 쿠바 섬을 발견한 것은 1492년 1차 항해 때였다. 그는 쿠바 섬을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찬탄했다.

그 말을 뒷받침 하듯 세월이 흐른 지금도 쿠바는 여전히 아름다운 채 있었다. 쿠바는 온통 녹색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위에 툭 툭 던져진 듯 피어있는 부겐빌리아. 거리마다 골목마다 하이비스카스에 붉은 색이 선명하고 집 정원마다 피어있는 ‘큐피트의 눈물’의 주황빛은 아름다움의 끝이었다.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올드 아바나’(아바나의 옛 거리). 쿠바의 도시 아바나는 마드리드보다도 스페인의 고풍스러움이 남아있었다.

거리에 간판이 하나도 없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 관광국가로 도약하면서도 악질 택시 기사가 없는 나라가 쿠바다.

쿠바인은 놀라울 정도로 근면하다. 쿠바는 성실하지 않은 사람을 싫어한다.

미국의 경제 봉쇄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도시를 경작하여 유기농법 선진국이 된 것도 그 성실의 힘이었다. 그들의 성실이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미국의 코 아래 작은 섬나라가 지금은 남미의 지도국으로 우뚝 섰다.

암울한 지구촌에 인류의 희망을 일궈냈다는 찬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쿠바인은 아무리 위기적 상황이라고 해도 노래와 춤과 럼(rum)을 놓지 않는다. 춤추고 노래하고 마신다. 아니 노래하고 마시고 춤추고, 순서는 그 무엇이어도 상관이 없다.

쿠바의 바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다. 공장 폐수가 없기 때문이다.

쿠바의 바다를 보면서 ‘헤밍웨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쿠바의 집. 20년을 거기에서 지냈다.

헤밍웨이의 ‘쿠바시대’에 있어서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때였다. 그 때, 쿠바의 모든 라디오국은 평상시의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그의 수상 뉴스를 보도하기 위해서였다.

“쿠바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영광스러운 상을 수상했습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말이 끝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헤밍웨이의 쿠바의 집 ‘핑가 비히아’에서 그는 군중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격한 나머지 헤밍웨이의 목소리도 떨렸다고 한다.

그는 노벨상의 금메달을 쿠바의 ‘성모사원’에 헌납했다. 그 메달은 지금도 거기에 보존되어 있다. 결국 헤밍웨이는 사랑하는 쿠바의 민중에게 그 상을 바친 셈이다.

헤밍웨이가 쿠바를 영원의 땅으로 정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아메리카 문단과 거리를 두고 다른 작가와의 교류를 피해 작가활동을 하려고 했다. 또 이미 유명해진 헤밍웨이는 매스컴에 방해받는 걸 싫어했다. 그런 면에서 쿠바는 최적이었다.

혁명 이후 쿠바정부는 예술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기로 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맘껏 활동을 한다. 단돈 천원을 내고 수준 있는 연극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움을 떠나 부러움이었다.

쿠바는 문화단체에 보조금 지급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소홀히’가 아니라 적극적인 지원을 한다.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제주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봤다. 해마다 예산이 삭감되었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동냥 주듯 하는 ‘문화 예술 보조금’.

동냥자루를 찢지나 말아야 하는데. 우울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