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그림자(虛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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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성 제주국제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논설위원>
S는 작년 11월 중순, 한 동안 소식이 뜸했던 가까이 지내던 대학동문 친구인 P에게 전화를 여러 차례 했으나 통화할 수 없었다. 그와는 전공이 달랐으나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 후 도서관에서 만나 하숙을 같이 했다. 대학 졸업을 얼마 남겨두고 둘이서 하숙집에서 취업준비 중에 연탄가스를 마셨는데, 그날 일요일 새벽. 꿈속에서 살려달라는 P의 외침을 듣고 불길한 예감에 찾아온 같은 과 친구 덕분에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경기도 북쪽 휴전선 인근 농촌마을의 가난한 농부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P는 형제 중 홀로 대학을 나와 S와 함께 K항공사에 입사해 10여 년 같이 일했다. A항공사로 옮긴 그는 북경지점장을 역임하고 일찌감치 명퇴하여 자그마한 여행사를 경영하던 터였다. 그의 집 전화도 연결이 되지 않자 수소문 끝에 그의 아들 직장을 확인, 아들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11월 중순경 P는 목이 한동안 영 불편하여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진찰을 받았는데 폐암 말기 판정이 나와 병원에 한 달 여 입원했다가 12월 중순 별세했다는 것이다. 평시 건강하고 술은 잘했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는 듯 했는데(하기야 담배 피운다고 다 폐암 걸리는 건 아니지만…). S는 뜻밖의 소식에 아연실색하여 사람이 과연 살아있다 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뒷통수를 무엇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져 왔다. S가 서울 가면 친구 왔다 반기며 삼계탕과 생맥주 사던 친구였다는데…. 그는 유독 명예욕과 돈 욕심이 강해 이전 직장에서 승진이 지지부진하자 직장을 옮겼고 각고의 노력 끝에 중역까지 올랐지만 여행사를 하면서는 영업이 부진하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한다.

얼마 전 50대 초반의 여사장이 급서했다. 모 브랜드 메이커 상품의 대리점을 서너 곳 운영하던 사람인데 운동 후 집에서 홀로 샤워하다가 쓰러져 있는 것을 귀가한 남편이 발견한 것이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두 시간 이내 발견하여 병원으로 옮겼더라면 살 수 있었다는데. 자식들은 외지에 나가 있고 혼자 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재물을 쌓아놓고 쓰지도 못하고 돌연히 가다니 가엾다.

2월 어느 날.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H교수는 갑자기 주저앉아 구토를 하며 일어서지를 못했다. 주변의 교수들이 놀라 황급히 병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의사는 이미 숨졌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정년이 몇 년 남은 원로교수였다.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다르겠지만 붙임성이 있고 소탈하여 필자가 다니는 사우나탕 직원들에게도 간간히 음료수 파티를 해서인지 인기가 있었다. 교내에서나 사회적으로도 활동적이어서 직함도 서너 개 갖고 있었고 표창장도 받은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깝다. 작년에는 한라산을 50회 올랐으며 헬스클럽에도 매일 아침 5시반이면 제일 먼저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해 운동하고 온갖 건강프로그램은 빠뜨리지 않고 참여했다는데 건강관리에 너무 무리한 탓이었는가…. 학교에서 치른 장례식을 마치고 운구차를 보내면서 K교수가 나직이 뇌까렸다. “난 이제 모든 것 내려놓으렵니다.” 그는 화장장까지 따라가서 한 줌 재가 되어 병에 담겨 나오는 것을 보고 집에 돌아와 글라스로 소주 네 잔을 마셨으나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했다. 병에 담긴 유해를 H교수네 밭에다 평장하고 자그만 비석 하나 세우니 끝이었다던가. 그래서 중국 고문에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읊었나 보다. “인생은 거개가 백세를 못 채우는 법, 이승에의 즐거움이 과연 얼마나 되련가(人生不滿百, 爲歡幾何)?” 바람처럼 왔다가 소리 없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인생인가.

중국 청나라 건륭(乾隆)황제가 강남에 유람할 때 운하에 수많은 배가 바삐 오가는 것을 보고 측근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저들이 저리 바삐 오가는가?”시종이 답했다. “모두가 명예(名譽)와 이권(利權)때문입니다." 사기(史記) 공자세가찬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천하의 임금이나 현자들은 많았으되 생존 시 영화를 누린들 죽어지면 끝이로다. 공자는 (벼슬 않고)베옷을 입었으나 대대로 (그의 처신이나 말씀이)전해져 모든 배우는 자의 모범이 되었도다.(天下君王, 至于賢人衆矣. 當時則榮, 沒則已焉. 孔子布衣, 傳十餘世, 學者宗之.)“

어지러운 현세, 끊임없이 돈과 명예를 좇다가 어느 날 갑자기 허무하게 가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짧은 인생, 어찌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일까. 밝은 햇볕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 도대체 그림자가 사람인가 사람이 그림자인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빈 그림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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