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림의 방랑자-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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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포수와 야수
일본 군인들은 그대로 소련 간첩들의 옆을 지나갈 것 같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간첩들이 엎드리고 있는 곳에서 소리가 났다. 사람의 체온과 몸무게에 쌓였던 눈이 바싹 소리를 내고 꺼졌다.


일본 군인들은 간첩들을 발견하고 총을 들어 올렸으나 그걸 쏠 틈이 없었다. 서닌과 노라니는 표범처럼 일본 군인들에게 덤벼들었다.


간첩이란 그럴 경우 어떻게 한다는 훈련을 받고 있었다. 왼손으로 적의 몸을 감아 끌어안으면서 바른 손에 쥐고 있는 칼로 적의 심장을 찌른다.


서닌은 물론이고 여자인 노라니도 그렇게 했다. 일본 군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사람이란 약한 동물이었으며 그런 기습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노라니는 쓰러진 적의 목을 잘라 죽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으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서닌과 노라니는 죽인 일본 군인들의 외투와 장갑 등을 벗겼다. 그리고 시체들을 눈속에 파묻었다.


서닌과 노라니는 일본군의 외투를 입고 다시 동남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밤새 걸어갔다. 눈은 점점 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소련의 간첩들은 초인적인 체력과 의지력,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있었으나 그래도 한계가 있었다. 이를 악물고 서닌의 뒤를 따라오던 노라니가 드디어 쓰러졌다.


“힘을 내. 여기서 죽으면 안돼.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서닌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 여인을 살리려고 있는 힘을 다하고 있었는데, 여인이 죽으면 그 힘도 사라질 것 같았다.


“날 버리고 가요. 저 가방 안에 기밀문서가 있으니 그걸 갖고 당신 혼자서라도 도망가요.”


“안돼.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여인은 눈을 떠 사나이의 눈을 봤다. 사나이도 여인의 눈을 보고 있었다.


마주보는 시선들 사이에 뭔가 힘이 생겼다.


자기뿐만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도 살아야만 했다.


여인이 일어났다. 여인은 사나이의 부축을 받으면서 걸어갔다. 한발 한발을 옮기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서닌은 그 빛 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서닌은 굵은 삼나무 밑둥을 조사하고 있었다.


드디어 한 시간쯤의 조사 끝에 그걸 찾아냈다.


나무 밑둥에 도끼로 찍어낸 자국이 있었다. 산 사람들이 남겨놓은 기호였다. 방향을 가리켜주는 이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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