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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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前 제주문화원장 / 수필가
나에겐 영원한 친구가 하나 있다. 오랜 세월 함께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을 쌓은 친구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함께한 죽마고우는 아니다. 내 나이 40대 중반에 제멋대로 찾아든 친구다.

처음 대면했을 때는 이름도 듣기 싫었다. 더욱이 평생을 함께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땐 까무러치게 놀랐다. 화가 치밀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기도 했다. 그뿐인가. 공복감이 밀려오면 먹고 또 먹는다. 그래도 허허로웠다.

이놈은 날이 갈수록 간섭도 심해졌다. 식습관을 고치라 하고, 체중을 줄이라 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증에 빠지게 한다. 고약한 심술쟁이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온갖 방법으로 쫓아내기에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 친구는 헤어지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너 좋을 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심보라고나 할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1960~1970년대, 배고픈 시절, 살이 찌고 배가 나온 사람들은 사장이란 닉네임이 붙었다. 사장은 풍요의 상징이었으니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나도 체중이 무려 85㎏을 웃돌았다. 선생이었지만 사장으로 불리기 일쑤였다. 몸이 허약하다고 오합주를 빚어 마시고, 경옥고를 달여 먹은 덕이다. 그뿐인가. 퇴근 후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다. 정치인을 욕하고 규탄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러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면, 내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밥 한 그릇 찌개 한 냄비를 말끔히 비우고 자리에 들어 코를 골며 천하태평으로 잠을 잔다. 그러니 뚱보가 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뚱보 없이는 못사는 그 친구가 찾아든 것이다. 나 스스로 환경을 조성했으니 어찌 그를 탓할 것인가. 다른 친구들을 불러들여 다 방면으로 괴롭히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구러 35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하는 동안, 이제는 그 속성을 두루 간파했다. 그를 다스릴 요령도 터득하고 참을성도 키웠다. 그뿐인가. 그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받아들일 아량도 생겼다. 이제는 그가 궁시렁대도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내 업보로 수용한 것이다. 참으로 홀가분하고 편안하다. 그는 누구인가. 성은 ‘당’이요 이름은 ‘뇨’다.

이제 그놈은 나에게 해로운 친구가 아니다. 오히려 고마운 친구다. 그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술과 담배를 계속 즐겼을 터이니, 이미 저승사자에게 끌려갔을 지도 모른다. 살아 있다 해도 괴사병으로 다리를 절단해 앉은뱅이가 될 수도 있고, 투석으로 근근이 생명을 이어가는 서러운 신세일 수도 있다. 그를 만남으로써 꾸준한 식이요법과 지속적인 운동으로 체중을 조절, 현대인의 조롱거리가 되는 비만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 아닌가.

좋은 친구 나쁜 친구가 따로 있을까? 정을 쌓으면 친구가 되는 것 아닌가. 성현이 이르기를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나니 병으로써 양약을 삼으라.’하셨다. 사람들은 친구의 속성을 알아 함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그때 그때 나타나는 현상과 생각에 따라 좋은 친구, 나쁜 친구를 구분하려 한다. 원래 좋고 나쁨이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아직도 젊은이 같다고 칭찬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친구에게 감사한다. 만인이 싫어하는 고얀 놈이지만, 그로 하여 나 는 삶에 균형을 얻은 셈이니 말이다. 어찌 그를 고맙다 아니하랴. 그는 나의 은인이요, 영원한 친구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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