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그 내밀한 삶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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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전 제주학생문화원장/수필가
벽과 창으로 세상과 유리시킨 내밀한 삶의 공간. 그 곳에서 개인이나 가족이라는 집단이 저들만의 독특한 삶을 영위한다. 그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도록 법의 엄격한 보호를 받고 있는 구역이다.

코 대면 맞닿을 이웃 간에도 서로가 상대의 집안 사정에 관심을 끄고 살아야 한다. 혹여 이웃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또 다른 이웃은 대부분 방관자일 뿐이다.

얼마 전 이웃집 어린 아이의 비명소리가 동네의 고요를 사정없이 찢어놨다. 한동안 악을 쓰듯 울어대는 소리에 정신까지 멍할 지경이었다. 잠시 후 경적 소리와 함께 경찰 순찰차가 그 집 현관 앞에 멈춰섰다. 누군가 신고를 한 것이다.

노췌한 할머니가 수심어린 얼굴로 나타났다. 동네 아낙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여들고, 경찰이 사유를 추궁하자 손자녀석이 하도 말을 안 들어 손찌검을 했단다. 애가 워낙 엄살이 심해 할머니 손이 제 몸에 닿기도 전에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단다. 그래도 경찰이 안으로 들어가 확인을 해야겠다니 그러라고 순순히 들여보낸다.

구경꾼들은 예상외의 싱거운 결말에 실망하는 듯 흩어져 돌아간다. 무섭고 부끄러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웃 간에 소소한 관심과 소통만 있으면 미리 예방하거나 적어도 경찰까지 불러들일 일은 아닌데….

내 소싯적 고향집 여름밤이 생각난다. 저녁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워놓았다.

동네 꼬맹이들은 모기를 사냥하는 잠자리 떼와 반딧불이를 쫓아, 내 집 뉘 집 가리지 않고 휘저어 다녔다.

동네 여인네들도 수시로 이웃집에 드나들며 푸성귀도 나누고, 밥도 같이 먹고, 한담까지 실컷 나누고서야 자리를 뜨곤 했으니, 창문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집을 이고 살았지만 이웃집 곳간 사정까지 훤히 들여다 볼 정도로 서로의 형편을 헤아리며 주고받는 정으로 얽혀 살았다.

그야말로 이웃의 경계를 허문 한 집안 같은 삶이었다고나 해야 할지….

밝고 화려한 유리창에 럭셔리(luxury)한 문명의 기하학적 구조와 골조로 지어진 오늘날의 집. 외벽은 다닥다닥 붙어있으면서도 그 안은 딴 세상처럼 아득하고 소원(疏遠)하다.

이웃집에서 아이가 태어나는지, 사람이 죽어나가는지 관심도 없고, 혹여 관심을 보인다 해도 잘못하다가는 사생활 침해가 되어버리는 희한한 세상이다.

이러한 삶의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이웃 간의 소통은 끊기고, 나와 가족 밖에 모르는 극단적인 이기와 단절의 삶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말았다.

이웃과 더불어 삶의 경험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양보와 배려의 덕목을 아무리 외쳐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정 더불어 사는 삶의 문화를 복원할 길은 없는 것일까? ‘이웃과 더불어 자연에 순응하며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삶’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높다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우리의 삶 또한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이웃은 어찌되든 저만의 소비와 향락을 추구하는 우리의 삶. 행복으로 다가가는 삶의 방식과는 거리가 먼 듯싶다.

누가 그랬듯이 이웃의 불행은 내 행복까지도 불행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음이니, 모든 게 부족했던 내 어릴 적 삶이 오늘의 삶 보다 더 행복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이웃 간의 친밀한 소통과 서로 돕고 의지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리라.

이웃 사이에서 이웃과 정 나누기를 외면하는 오늘의 삶, 어쩌면 우리의 불행은 거기서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가 꼴찌수준이라는 현실이 그걸 말해주고 있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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