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초년생의 태풍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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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영. 제주해녀문화보존회 대표
우리 마을 어촌계장은 태풍이 오기 며칠 전부터 마을과 바다를 둘러보며 주민들에게 철저한 대비를 당부한다. 해녀들은 말리던 감태를 갈무리 하고, 어부들은 어선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며, 상점 주인들은 외부 간판을 들여놓고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는다. 늦은 오후가 되니 마을은 태풍 전야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조용하다.

제주 초년생에겐 태풍이 오는 그 날 오전까지도 바람이 조금 더 불었을 뿐, 평소와 별다른 기미가 없고 오히려 평소보다 하늘은 더 맑기만 하다고 느낀다. TV는 연일 태풍 볼라벤의 등급과 중심 기압·영향 반경·초속·풍속·이동 경로를 생중계 하듯 지겨울 정도로 방송을 하지만, 태풍이 오리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청정한 날씨로 대비에 게으름을 피운다.

첫눈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긴장감과 설레임이 교차되며 카메라를 들고 바다로 나선다. 바다의 넘실대는 너울에 탄성을 지르며 셔터를 누르다 오후 늦게부터 심상치 않은 바람의 낌새를 느끼고 뒤늦게 허둥거리며 들어온다.

바다 경치가 보이는 건물 3층에 유달리 큰 유리창이 있는 방을 선택한 나는 그 값부터 톡톡히 치른다. 그날 밤 바람에 부풀어 오르는 대형 유리창을 걱정하며 지인들에게 통화하니 여태 대비를 안한 것을 나무라며 여러 방법을 조언한다.

‘청테이프를 S자로 붙여라, 투명 테이프를 별모양으로 붙여라, 젖은 신문지를 붙여라’ 결국 찾아온 이웃의 권유로 중요한 서류들과 노트북을 챙겨 옆집으로 피난을 간다.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날이 밝아 바람이 진정되어 내 방으로 돌아온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행히 단수와 단전 외엔 별다른 피해가 없는 것 같다. 거센 바람에 견뎌 준 유리창이 새삼 대견하다고 느낀다.

막상 전기가 끊어지니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핸드폰과 전화가 안 되고, 컴퓨터가 안 되며, 냉장고에 음식이 녹아내리고, 에어컨을 못 켜니 해풍으로 습한 방은 마치 습식 사우나 같다.

마을 주민과 그나마 다행인 피해를 서로 위로하며 눈인사를 나눈다. 물이 나오는 수도를 찾아 물을 길어 나르고, 집 앞 쓰레기를 치우며 녹아내린 음식을 정리할 즈음 다시 전기가 들어온다.

전기가 들어오니 불통됐던 핸드폰이 터지고 기다렸다는 듯 안부 문자와 부재중전화 문자가 물밀 듯 들어온다. 안부를 물어준 이들에게 고마워 일일이 전화를 하니 한나절이 다 간다.

마을 곳곳의 쓰레기를 수거하고, 전기를 복구하고, 도로를 정리하는 이들의 손길이 감사하다.

태풍은 인류가 겪는 자연 재해 중 하나로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태풍은 매년 이맘쯤 우리가 꼭 겪어야 할 것 중 하나다. 그리고 굳이 태풍의 순기능을 말하자면, 저위도 지방에서 축적된 대기 중의 에너지를 고위도 지방으로 운반하여 지구상 남북 온도의 평형을 맞춰주고, 해수 순환을 통해 생태계를 활성화 시킨다. 그리고 공기 정화와 수자원 공급의 기능도 빼놓을 수 없다.

태풍이 그러하듯 모든 일들은 양면성이 있다. 나부터도 그렇듯, 그 양면을 다 헤아리는 혜안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태풍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주는 자연 재해 역시 그 나름의 역할이 있고, 오히려 그 혜택이 더 크다는 것을 보면, 눈 앞의 이해를 따져 해롭다거나 이롭다는 이분법적 짧은 사고가 다 부질없는 일인 것이다.

제주에서의 첫 태풍 덕분에 새삼 모든 일상에 감사함을 느낀다. ‘잘가라 태풍! 내년에 다시 보자. 내년엔 좀 더 준비된 모습으로 당당히 맞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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