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덕에 비견할 만한 비구니 봉려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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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전 제주문화원장/수필가
의녀 반수 김만덕에 비견할 만한 제주 여성이 있다. ‘비구니 봉려관 스님’이다. 제주 불교 중흥조요,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에 역할을 한 사람,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다. 왜 그런가? 비구니였기 때문이지 싶다.

제주 최초의 항일 운동, 무오법정사항일항쟁은 3·1운동 발발 전 해인 1918년 10월 7일, 김연일·방동화 스님 등이 법정사 신도 및 일반인 400여 명을 규합, 일제에 항거한 운동이다. 여기엔 자금을 조달하고 뒷바라지한 봉려관 스님의 노고가 숨어 있다.

지난 7월 17일 한국 불교 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 경내에선 봉려관 스님의 행적비 제막식이 열렸다. 76년 전 입적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업적을 기리는 자리였다. 반가운 일이다.

봉려관 스님은 해월굴에서 수행하면서 법정사를 창건했고, 수계 후엔 조계종 23교구 본사 관음사를 창건, 개산조가 되었다. 개산의 의의는 자못 크다. 억불 정책으로 200년 간의 제주 무불 시대를 종식시켰음은 물론, 한국 불교 사상 전무후무한 비구니의 교구 본사 창건 사례를 남겼으니 말이다. 여기에 무오법정사항일운동에 식량과 자금을 조달하는 등, 숨은 공적이 더해졌으니 그 스님을 기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스님은 1865년 제주시 화북동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되어 혼인, 가정을 이루고 살던 한 주부, 그의 출가 동기는 무엇일까? 34세가 되던 1899년 어느 날 우연히 탁발 고승을 만나 관음 보살상을 받는다.

그날부터 그 관음상을 모시고 염불 기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친다. 생각 끝에 출가를 결심, 한라산으로 들어가 토굴 수행을 시작한 것이다. 여성의 몸으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때로 법정악까지 포행을 하며 6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

‘제주 불교 중흥’의 대원을 세운 스님은 비구니계를 수계하는 게 급선무라 생각, 1907년 12월 전남 대흥사를 찾아 대덕 스님들을 만난다. 그러나 사미니계를 받지 않았기로 비구니계를 줄 수 없다는 게 아닌가.

스님은 ‘내가 깨달았음을 실증해 보이면 될 것 아닌가’라는 마음으로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병으로 신음하는 젊은 비구를 만났다. ‘내 이 병을 고쳐 보이리라’ 결심, 대중들 앞에서 믿기 어려운 오묘한 행으로 나병을 완치한다. 이로써 청봉화상을 계사로, 유장노니를 은사로 수계를 하고 제주로 돌아온다.

스님은 포교를 하는 한편 관음사를 창건, 초대 주지에 취임한다. 따라서 삼양 불탑사와 하원 법화사를 중창하는가 하면, 성내 중심에 포교당을 짓고, 동쪽으론 김녕 백련사, 서쪽으론 고산 월성사를 창건, 명실 공히 제주 불교 중흥조가 된다.

스님은 모든 절의 주지를 비구 스님으로 천거해 임명받고 화주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다. 제주 불교의 기둥이 된 스님,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의 밑거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슬프다. 1936년 5월 29일 세수 71세·법납 37세, 스님은 독버섯 요리 공양을 받은 뒤 임종계를 읊고, 의연히 열반에 드셨다. 때가 왔음을 예견했음이다. 입적 다음날엔 관음사 마저 불탄다.

일제에 동조한 세력에 의해 은밀한 방법으로 항일의 대부를 독살하고, 항일의 근거지를 불태우는 등 일제 경찰의 은밀한 술수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스님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봉려관 스님 선양회’가 창립됐다. 다행한 일이다. 스님의 초인적 활동을 재조명하고, 생시에 세워 운영했던 해월학교를 재건하고 장학 재단을 설립하는 등, 또 하나의 김만덕으로 현창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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