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회 탐라문화제 문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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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수. 前 제주예총회장/시인
지난 3일자 제주일보 2면 하단 귀퉁이에 ‘제51회 탐라문화제 문학제’라는 조그만 광고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는 9월 15일 열리는 ‘한국문인협회 제주특별자치도지회’의 행사 광고였다. 가뜩이나 주눅이 든 ‘제51회 탐라문화제’의 명칭에 햇볕이 드는 듯했다.

‘문학 백일장’은 ‘탐라문화제’의 간판행사로서, 초창기 ‘제주 예술제’ 시절부터 ‘한라문화제’를 거쳐 ‘제51회 탐라문화제’에 이르기까지 장장 반세기동안, 문학을 지망하는 제주 청소년들의 아련한 추억의 행사가 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누구든 젊은 시절에 문학적 감성으로 밤잠을 설쳐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1970년 전후, 필자는 두 개의 예술 단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하나는 내 친정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인협회 회원, 다른 하나는 연극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것이 필자가 예총에 관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문인협회엔 유능한 선배들과 문우들이 많은지라 걱정을 접어두고, 필자는 오히려 열악한 여건의 연극협회 쪽에 더 열을 올리던 터였다.

그런데 이 어인 일이랴! 1970년 ‘제9회 한라문화제’ 때 필자가 예총 사무국장을 맡았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문협·미협’ 등이 1971년 ‘제10회 한라문화제’를 치르는 그 1년 사이에 모두 해체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도 ‘제10회 한라문화제’ 프로그램을 보면 ‘문협·미협’ 행사들이 모두 빠져있는 것만 봐도 그 당시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래선 안 되는데’ 하는 우려로 지내다가 1972년 예총 임원 개선을 맞아 예총지부장에 피선됐다. 그 때의 심정을 1972년 7월 21일자 제주신문(제주일보 전신) 2면의 ‘5분간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밝힌 바 있다.

‘흩어져 있는 문협과 미협을 결속하여 재기를 모색하고, 예총의 내부 충실을 기하는 것이 이번 예총을 맡은 저의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이지 문협과 미협은 예총 내의 정수 단체가 아닙니까? 이 단체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예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필자의 원래 소속이 ‘문협’이었고, ‘미협’ 인사들 중엔 지인들도 많았기 때문에 손쉬울 줄 알았는 데, 막상 새로운 단체를 창설하는 일 보다 어려움이 많았다. 해당 회원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때로는 삼고초려도 불사하며 상당 기간 애를 썼다.

결국 ‘문협’이 재결속된 것은 1972년 ‘제11회 한라문화제’ 행사를 몇 달 앞둔 8월 30일이었다. 20여 명이 칠성로 천호다실에서 회동, 한국문인협회 제주도지부 설치안을 가결함으로써 ‘재건 문협’이 출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연하면, 필자는 어렵사리 ‘문협·미협’을 재결속한 여력을 몰아, ‘제11회 한라문화제’ 개최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산업화 시대였던 그 당시라서, ‘문화제 무용론’과 ‘격년제 실시 주장’ 등으로 한시름 놓고 있는 행정 당국을 설득하고, 도백의 재가를 얻어내어 불투명했던 문화제 개최 계획을 확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도·시·군의 보조금만으론 행사비의 절대치에 못 미치는 실정이라, 방명록을 들고 도내·외 독지가들을 찾아 다니며, 찬조 행각을 벌여 행사비 충당에 급급했다. 그런 가운데 행사비의 10%를 떼어 ‘제11회 한라문화제 기념 문집’ 발간비조로 지원하게 된 것이, 현재 56집까지 발간된 ‘제주 문학’ 창간의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제주 문학’ 창간 당시 회원 수가 22명이던 것이 40년이 지난 2012년 현재, 모든 문학 장르를 아우르는 기성문인 245명이 기라성같이 빛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디 ‘제51회 탐라문화제 문학제’의 대성황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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