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퇴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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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호. 前 중등교장/시인
“퇴임하셨지요?” 이웃집 선생님이 인사말 대신에 물어온다. 물음 인사 다음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연민의 표현을 해야 할지, 축하의 표현을 해야 할지 그의 입속에서 뭉그적대며 머뭇거리는 어떤 말마디가 내 눈에 보인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다. 날은 저물어 가는 데, 걷고 걸어도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목도 마르고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린 아들이 더 탈진해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며, 포기할 뜻을 비치는 말을 했다. 더군다나 그때 사막 길 옆에 돌무덤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을 보자 아들은 힘이 더 빠졌다. “보세요, 이전에 다른 사람도 더 이상 가지 못하여 이곳에서 죽은 것 같아요. 이젠 더 못 걷겠어요” “그렇게 보지 마라. 무덤이 있다는 것은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밝은 쪽을 봐라, 무덤은 새로운 시작이다” 그렇게 힘을 내어, 그들은 사막을 걸어 마침내 마을에 닿았다.

시작과 끝에 대한 동·서양의 공통적으로 잘못된 문화 의식이 한 가지 있다. 먼 항해를 나서기 위해 배가 출항할 때엔 왁자하고 화려한 팡파르와 온갖 깃발로 축복을 빌어 주지만, 정작 항해를 마치고 귀항(歸港)한 선박에 대해선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동서양이 다 그렇다. 이를 탈무드는 또한 꼬집고 있다. 험난한 세파(世波)에 침몰할 상황을 모면하며, 페인트가 벗겨지고, 돛이 찢어지면서도 멀고 먼 항로에 때로는 피항(避港)도 하면서, 목표를 가득 채워 싣고, 이물(船首)과 고물(船尾)의 피칭조차 내지 못할 만큼 힘이 다 소진하여 출발한 곳으로 돌아왔을 때, 이를 축하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끝이 있어야(有終) 아름답다는 말처럼, 순위에 상관없이 마라톤 완주를 맞아들이듯이 박수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퇴임하시니 어떻습니까?’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이런 답변이 나올 것 같다. ‘아! 제가 교장(校長)이었구나하고 이제야 느낌이 오는 것 같습니다’ 항해 중엔 어느 항해사도 장담을 할 수 없다. 긴장의 연속이다. 살얼음을 걷는 것 같기도 하고, 무덤까지 갖고 가야할 일도 누구나 겪었을 것이다.

‘퇴임하니 어떤가?’ 스스로 내게 물었다. 내세울 일은 어디론가 잦아져 보이지 않고, 회한(悔恨) 언덕만 뭉클뭉클 떠오른다. ‘그냥저냥 간신히 학점이나 따며 졸업하려는 그런 과정(Scraping)’의 연속은 아니었는가.

필자는 릴레이 경주(競走) 관람에 혼이 잘 빠진다. 첫 주자가 선두라도 예측할 수가 없다. 어떤 팀의 주자 모두 다른 팀의 가장 빠른 선수보다 빠르다고 해도 장담할 수가 없다. 바턴이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선두로 바턴을 이어받은 주자가 뒤쳐져 갈 때, 그의 심정은 어떨까. 다른 팀 선수가 더 빠르면, 나는 혼신을 바치는 데도 힘을 다 내지 않고 뛰는 것처럼 보이고, 세평(世評)의 혀는 이에 더 날카롭다. 전임(前任)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허물어뜨릴 수도 있다. 릴레이는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폭우에 비새는 곳이 있는가 살피고 있었다. 마침 청소 시간이었고, 복도 청소를 하던 학생 둘이 “교장선생님, 이렇게 잠깐 서 계십시오” 하고는 큰절을 하지 않는가. 이에 다른 학생들은 박수를 보낸다. 퇴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앞질러 복도를 바삐 지나던 학생이 되돌아서서 ‘배꼽 인사’를 하고 총총히 교실로 간 그런 학생들을 가르치는 후임(後任)의 힘찬 물결에 전임(前任)은 평온하게 바다로 흘러가는 것 아닐까. 40년 6개월의 항해에 흠이 없을까만 박수를 받고 싶은 9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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