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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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前 제주학생문화원장/수필가
계절의 순환은 어김이 없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여름의 무더위도 가을의 기세에 밀려 그 꼬리를 감춰버렸다.

한라산을 짓누르던 뭉게구름도 더위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산은 이제 온전한 모습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날 오라 손짓한다.

더위 때문에 미뤄뒀던 게 어디 산행뿐이랴.

느림보 열차에 올라타 계곡을 건너고, 들판을 지나 숲 속에 감춰진 시골 풍경도 구경하고, 귀뚜리 울어대는 농막(農幕)에 들어앉아 선현들의 이야기도 읽으며 이곳저곳 내밀어야 할 원고지도 채우고….

어느 해안가에선 팔뚝만한 고기들이 낚시꾼과 힘겨루기가 한창이라는 입소문도 나를 부른다.

가을의 자연은 어디나 호경(好景)이다. 산이면 어떻고 바다면 어떤가.

들과 계곡, 해안을 따라 아이들이 그려놓은 선처럼 삐뚤어진 꼬부랑 올레길을 걷는 것도 가을이 제격이다.

그러고 보면 콕 집어 해야 할 일이 없는 내 삶도 가을은 바쁘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다 섭렵할 수는 없는 일. 그저 맘속에서 도상 작전 같은 가상 체험이라도 해볼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즐거움이 될 수 있는 호시절이다.

하고 싶은 일이거나 해야 할 일의 순서가 뒤엉킬 때면, 모든 걸 내려놓고 농막으로 향한다.

몇 권의 책과 노트북만 챙겨들고서. 거기서 책 한 권 골라잡아 읽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What people are living by)’(꿈꾸는 아이들, 2003), 톨스토이 단편 모음집이다.

하느님의 분부를 거역한 죄로 지상으로 쫓겨난 세몬(천사)이 다시 천사로 귀천(歸天)하기 위해 하느님의 시험 과제를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저 인간들의 생각일 뿐, 인간은 오직 사랑의 힘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고 한 톨스토이의 마지막 메시지는 내 심연에 파장을 일으킨다.

톨스토이는 위대한 작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이처럼 독서는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상한 즐길 거리다. 독서의 중요성이나 가치 접근적인 잇속을 털고 가볍게, 틈나는 대로, 어디서나, 몇 줄씩이라도 읽는 버릇을 하다 보면 내 곁에 책이 없으면 허전해서 못 살 것 같은 그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얼마전 모 신문에서 우리나라 국민의 독서량이 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이란 기사를 보았다.

한 달에 책 한 권도 안 읽는다는 사람이 56%에 이르고, 한 달 독서량 평균치가 1.14권이라 했다. 인터넷 보급률 1위에 독서량은 꼴찌 수준이라니, 어쩐지 내 자신이 경박스러워 뵈고 부끄러운 생각마저 든다.

마음의 안정을 얻거나 내면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는 독서만한 게 없다. 특히 문학 작품은 혼란스러운 내면에 질서를 부여하고 자신과 세계를 이어준다.

한 편의 시구(詩句)가 심금을 울리고, 한마디 명구(名句)에서 심안(心眼)이 트인다. 삶의 연륜으로 빚어낸 한 편의 수필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내 안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농막의 밤은 그 적요가 청징하다. 책 읽기에 몰입하다 보니 불안과 소란들이 씻은 듯 잦아들고, 내 안은 그야말로 평화와 고요로 채워진다.

아, 이게 고고(孤高)한 희열인가 보다. 그러고 보면 독서는 그 희열을 좇는 가벼운 마음의 여행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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