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달에 생각나는 현곡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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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前 제주문화원장/수필가
문화의 달에 현곡(玄谷) 선생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제주 문화 발전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제주문화원 초대·2대 원장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남제주문화원과 북제주문화원 창립에도 힘을 다했고, 한국문화원연합회 제주지회 초대 회장을 맡아 제주 문화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제주문화원장 재임 시엔 문화 학교를 개설, 문화 강좌를 열고 시민 문화 욕구 충족에 힘썼다. 향토 사료 집 속음청사·지영록·병자일록·남유록·달고사·탐라별곡·증보 탐라지·노귤 화암 시집·남사일록·노봉문집 등 희귀본을 발굴, 역주본을 세상에 펴내 후학들에게 빛이 되었다.

현곡 선생은 중학교 시절 형의 서가에 꽂힌 세계 문학 전집을 읽고 문학의 꿈을 키웠노라 한다.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언제부터인가. 6·25전쟁 발발 후 제주제일중학교 교사 시절이다. 함께 근무하는 피란민 교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소설가 ‘계용묵’과 만나 그와 더불어 종합 교양지 ‘신문화’를 창간하고, 시 ‘그리움’을 발표, 이름을 세상에 알린다.

1953년엔 제주 초유의 문학 동인지 흑산호(黑珊瑚)의 발간으로 문학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주어 제주 학생 문단이라 할 수 있는 ‘별무리’가 탄생되고, 선생은 지도위원으로 활동한다.

행운은 이어진다. 피난 문인들이 1955년께 모두 상경하고, ‘박목월’ 시인이 내도한 것이다.

그는 제주대학에서 문학 강의를 하고, 현곡 선생은 수강을 하며 교분을 쌓았다. 드디어 1959년 ‘박목월·유치환’ 두 시인의 추천으로 ‘구름’·‘하늘’ 2편의 시가 사상계지에 실려 문단에 오른다.

박목월은 반년 만에 제주를 떠나고, 시인 ‘김영삼’이 내도한다. 그의 주도로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제주도지회를 창립했지만, 5·16의 발발로 해체된다. 그러나 5·16 1주년을 기해 한국예술단체 총연합회가 다시 창립되고 지방에 지부를 둘 수 있게 되자, 3개의 예술 단체(문인협회·미술협회·음악협회)를 꾸려 합동 총회를 열고 예총 제주도지부를 창립, 선생은 초대 지부장에 피선 취임한다.

제주예총 창설 한 달 뒤엔 제1회 제주 예술제가 열린다. 칠성로 중앙극장이 주 무대였고, 오아시스·청탑·동백 다방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게 탐라문화제의 효시다. 이 예술제가 발전을 거듭하더니, 50년 만에 ‘탐라대전’으로 개칭, 규모나 내용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보게 됐다. 그 씨알을 심고 가꾼 현곡 선생에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1963년, 선생은 제주 초유의 개인 시집 ‘파도’를 발간, 제주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문학인들의 가슴에 열정의 불을 지폈다고나 할까. 창작 활동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가곡 ‘떠나가는 배’다. 제주제일중 재직 시 노랫말을 짓고, 동료 피란민 음악 교사 ‘번훈’이 곡을 붙인 것이다.

피란 왔던 사람들이 떠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심정을 시에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현곡 선생 자신이 애인을 보내는 심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 박목월이 절절하게 사랑하던 애인을 떠나보내는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변훈이 제주를 떠난 뒤에 박목월이 입도했으니 사실과 다르지만, 시인 박목월과 연계시킴으로써 이 노래는 애틋함이 더해지고 있으니 어찌할 것인가.

6·25전쟁은 한국을 초토화 시켰지만, 현곡 선생에겐 문학의 길을 활짝 열어 준 셈이다. 언젠가 ‘현곡 양중해’ 선생을 기리는 문화 사업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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