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비경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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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제주도교육청 장학관/수필가
고교 동창들과 올레길 나들이에 나섰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차를 달려 한경면 용수리로 가는 길목에 정차했다. 그곳은 절부암(節婦庵). 전설의 마을이자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고향으로 가다 표착하여 첫 미사를 집전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을에는 ‘김대건 신부 표착 기념관’이 있고, 도로명도 김대건 신부로다. 그 길을 따라가다 숨은 절경을 찾아낸 우리는 환호성을 질러야 했다. 누워있는 거인과 비상하려는 독수리가 환상처럼 나타난 것이다.

가끔은 섬도 변화를 꿈꾸는가 보다. 같은 풍경이라도 언제 어디서 누구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에. 눈에 보이는 것도 이러한 데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이래서 관점의 차이가 생긴다. 이곳은 관점을 생각하게 하는 숨겨진 비경이 있고, 신화가 있어 더욱 좋다.

중국 송나라 시절, 제주섬에서 출중한 인재가 태어나리란 점괘가 있었다. 섬 도처에서 혈맥을 끊고 산방산에 도착한 중국 지관인 호종단은 산방산에서 뻗어 내린 와룡의 형상을 예리한 무쇠침으로 찌른다. 승천을 기다리던 와룡은 피를 토하며 바위로 굳어져, 지금의 용머리 바위가 되었단다. 뒤늦게 이방인의 만행을 알아차린 한라산 신령이 매로 변해 날아와, 호종단 일행이 탄 배를 수장시킨다. 차귀도(遮歸島)는 호종단의 귀국을 차단한 섬이라는 뜻이니, 전설이 곧 사실임직도 하다.

차귀도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다. 오백장군의 막내가 고고하게 서 있는 것이다. 오백장군의 어머니인 설문대 할망은 아들들을 먹일 죽을 끓이던 솥에 빠져 죽는다. 형제들이 먹은 것은 어머니의 피와 살로 쑨 죽이지만, 막내가 본 것은 어머니의 유골이었다. 형들이 미운 막내는 차귀도로 날아가 돌이 되고, 형제들도 비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해 영실 절벽에 떨어져 바위가 되었단다.

전설의 바다와 한라산 자락의 풍광을 바라보며 해안가 절벽 위의 길을 걸었다. 저 너머 차귀도와 마주한 수월봉과 그 아래 펼쳐진 들판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뱀과 귀신을 모신 당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은 당오름을 내려오니 ‘자그내’ 포구가 우리를 반긴다. 오징어 말리는 현장을 보고서는 고산 평야라고 불리는 드넓은 평야 지대를 가로지른다.

예전에 이곳은 밭이 아닌 논이었고, 평야 동쪽에는 ‘자그내’라는 자그마한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됐다는 안내의 글을 읽으며, 유물의 모조품이라도 전시된 곳이 있다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수월봉 절벽 아래에는 일본군이 파놓은 진지 동굴도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대미항전의 마지막 보루를 일본 본토가 아닌 제주도로 삼았던 역사적 흔적인 것이다. 강정 마을에 들어설 해군기지 건설로 제주는 아직도 홍역을 앓고 있는 듯하다. 일제가 건설한 제주섬 도처의 진지 동굴과 우리 손으로 건설할 해군기지가 교차되며 어른거린다.

수월이와 녹고의 전설을 회상하며 차귀도 앞 해안가로 향한다. 이곳은 해안의 지질이 매우 특이하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지질 공원이기도 하다. 이렇듯 도처에 비경으로 가득한 이곳에 신석기 유물 전시관과 같은 선인들의 삶의 흔적들을 재현할 수 있다면 ‘관광객 1000만’ 시대의 전초 기지가 될 수도 있음이다. 흔히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란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라 한다. 비경은 바로 그러한 눈으로 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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