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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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영남대학교 교수 / 논설위원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제법 쌀쌀해진 걸 보면 이제 가을도 깊어진 것 같다. 지난 여름 내내 사람들은 지독한 더위와 장마 때문에 그렇게 아우성을 쳐댔지만, 새로운 계절은 어김없이 우리들 곁에 찾아오고 또 물러간다. 시간의 흐름과 계절만큼 정직한 것은 없고 그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지금도 어디선가 새로운 생명은 탄생하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생각해보면, 가을만큼 우리에게 풍요와 상실을 동시에 보여주는 계절은 없다. 봄·여름을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온갖 풍상(風霜)을 다 견뎌낸 가을은 모든 영광과 기쁨, 상처와 슬픔을 다 껴안고 있다. 그래서 가을은 넓고 깊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

가을들판에는 새봄에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어 풍요로운 황금빛으로 일렁이고 있다. 일 년 중 가장 찬란하게 내리는 햇살을 송두리째 받으며 모든 곡식이 팽팽하게 여물어 가는 이 아름다운 경치 속에는 한 해 동안 땀 흘린 농부들의 노고와 사랑이 배여 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헛된 욕망보다는 땀 흘린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조급한 결과보다는 기다림의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일깨워 준다. 앞으로만 달리고 또 달려가는 우리들은 익어가는 가을의 마음을 닮아야 할 것이다.

가을 산과 들에서 타오르는 붉은 단풍은 당신을 향해 아직도 하고 싶은 말들이 그리 많다는 듯이, 다가오라고 손짓한다. 들국화와 억새가 넘실대는 길섶에는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 없는 꿈들이 하늘대고 있다. 금세 터질 듯 빨갛게 익은 감 홍시는 곧 지상으로 떨어지게 될 마지막 이별을 두려워하는 듯 온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나뭇잎들은 자꾸 자꾸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그리도 많다는 듯이.

가을은 상실의 계절이다. 지난봄의 싱그러운 시작과 여름의 강렬함을 다 거두고 이제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여기저기 자꾸 아픈 곳이 생기고, 새롭게 만날 사람보다는 헤어질 사람이 많고, 다가 올 시간보다는 떠나간 시간이 많은 중년과 같은 계절이 가을이다. 이제 알곡이든 쭉정이든 거두어 가슴 속에 서럽게 간직하고 떠나야 할 시간이다. 가을은 언제나 이별을 가르치는 친구이다. 그 친구는 벌써 또 한 해가 기울어가고 있다고, 이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시간이라고 귀띔 해준다. 창밖으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푸르던 풀들이 메말라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마지막 잎새’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 이별과 상실의 시간에도 일 년 내내 고생하며 거둔 풍요롭고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 이 비옥한 시간을 잘 가꾸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가을엔 나를 더욱 낮게 낮추어 겸손하게 하고, 나를 저 멀리 보내어 고독하게 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야 할 듯하다. 우리들의 남은 생애를 위해, 헐벗은 이웃을 위하여, 거둔 것을 골고루 함께 나누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무언가를 풍요롭게 거둔 자에게나 모든 것을 잃고 아픈 마음을 가진 자들 모두에게 축복이 내리기를 빌어야 한다.

이 맑고 푸른 가을에는 풍요를 기뻐하고 상실을 위로하며 누군가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우리 모두 깊어가는 이 가을에, 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고통은 가을 낙엽과 함께 다 던져버리고, 우리들의 마음에 희망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라면서 하늘 아래 저 누군가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내봅시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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