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line)과 원(cir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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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 서울대 교수/피아니스트
‘매크로코즘(Macrocosm)’ 과 ‘마이크로코즘(Microcosm)’ 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원으로 ‘큰’ 또는 ‘대규모의’ 를 뜻하는 ‘macros’, ‘아주 작은’ 또는 ‘극소의’ 를 뜻하는 ‘micros’ 와 ‘질서’ 또는 ‘세계’ 를 뜻하는 ‘kosmos’ 의 합성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 근원을 둔 이론으로 ‘우주(cosmos)’의 모든 단계, 즉 가장 큰 단위인 우주부터 원자보다 작은 단위의 것들까지에는 동일한 양식이 반복된다는 원리를 바탕으로 한 사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르게 표현해 공간(宇)과 시간(宙)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서는 공통된 원칙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이고 , 또 다르게 표현하자면 큰 것에서 작은 것들을 터득 할 수 있으며 또한 작은 것에서 큰 것을 터득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익히고, 지식을 습득한다. 그리고 사회의 규칙을 만드는 자, 집행하는 자, 따르는 자들 사이에서 세력 갈등을 거듭하며 누가 더 우월한 지위를 점령하는가를 기준으로 성공을 가늠해왔다.

허나 이는 결코 사회적 성공에 불과할 뿐 개인적 성공을 가늠하는 표준이 되지는 못한다.

개인적 성공은 사회적 성공과 평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행하지 않을 뿐 더러 아예 그 모양이 다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사회적 성공을 ‘선(line)’ 으로 본다면 개인적 성공은 ‘원(circle)’으로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개인적 성공은 어떻게 가늠해야 할까?

개인적인 성공은 물질적으로는 가늠하기 힘들다.

삶의 흐름 안에서 무엇을 깨우치고 행동으로 옮긴 후 시간이 경과되면 인간본성이나 다른 요소로 인해 그 깨우침에 갈등이나 의문이 발생하거나 아니면 그 깨우침은 몸에 배게 된다.

깨우침의 직전을 시발점으로, 그리고 시간을 추진제로 가정한 전제하에 이때 이 개인은 ‘원’을 한 바퀴 돌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만 ‘원’을 한번 완주했다고 똑같은 시발점에 도달했다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그렇지가 않다. 한 깨우침이 몸에 배거나 아니거나 일단 시행착오를 거친 후 다시 얻는 깨우침은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를 하자면 아름답지만 어려운 시를 낭독할 때 한번 읽은 것과 여러 번 읽은 후의 이해도가 다르고 또 젊을 때와 나이가 들어 읽은 후 영감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시발점에 도달했다고는 보이나 실제로 각도를 달리 해 보면 도달점은 시발점보다 더 깊은 곳에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 필자가 말하는 ‘원’은 이차원 현실에서만 존재하는 원이 아닌 무한차원에서 존재 가능한 계속되는 ‘원’ 인 것이다.

이렇게 개인적 성공은 깨우침을 원동력으로 ‘원’을 깊이 탐구할수록 그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며 현실적으로 그것을 가늠하는 비물질적 기준은 지속적인 깨우침을 통해 얻는 자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역설(paradox)’은 왜 본능을 이성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기능에 자부심을 지니고 다른 동물들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인간이 본능을 중요시하는 사회디자인을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사회와 개인적 성공의 동기를 각각 생존과 깨우침에서 얻는 자유라고 했을 때, 생존은 본능에 속하고 깨우침은 이성에 속하지 않는가?

물론, 본능을 무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조금 더 개개인에게 여유를 줄 수 있는 디자인은 불가능했을가?

예컨대 우수한 과학자와 음악가가 같히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과학자가 전문용어를 구사하며 지금 자기가 연구중인 이론을 논한다면 음악가는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어 할 것이고 반대로 음악가가 전문용어를 구사하며 음악의 섬세한 뉘앙스를 설명하려 한다면 과학자도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어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말의 내용은 이성적일지 모르나 의사소통의 방법은 아주 원시적이며 본능적으로 변하게 된다. 마치 이솝의 ‘여우와 학’ 이야기 꼴이 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양쪽이 맛있게 수프를 음미하려면 공통되는 그릇을 찾아야 한다. 이때 둘 다 개인적 발전에 공이 깊다면 전문지식을 과시하지 않고 서로의 ‘도(道)’에 대해서 논할 것이며 그 때 비로소 둘 다 풍요로운 지혜의 나눔을 경험 할 수 있을 것이다.

‘도(道)’는 ‘통(通)’한다 는 표현처럼 ‘매크로코즘(Macrocosm)’과 ‘마이크로코즘(Microcosm)’ 역시 하나를 터득하면 만사를 터득할 수 있다는 원리를 주장한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원’ 이며 ‘원’의 모양이 다차원적으로 일그러져 있을수록 이 원리를 터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도(道)’를 터득한 사람들은 항시 변하는 우주와 함께 자기 특유의 ‘원’을 자유자제로 통제 가능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사회적 성공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로서는 ‘선’ 만 보일 뿐, ‘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러분의 ‘원’은 지금 어떤 모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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