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農山) 강상옥(姜尙玉)선생 송덕비를 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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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前 제주문화원장 / 수필가
지난 9월 6일 서귀포시 하원마을 뒷동산 양지 바른 언덕에 농산 선생을 기리는 송덕비 제막식이 있었다. 이미 세워진 추모비가 도로 개설로 이설할 처지에 놓이자, 문하생들이 초라한 추모비를 땅에 묻고 송덕비로 고쳐 세운 것이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 하원마을 웃골에 서당을 열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길은 오직 교육에 있다는 일념으로 후진 교육에 진력한 것이다. 얼마나 항일정신이 강했던지 서릿발 같은 서당 폐쇄령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 신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독립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민족종교 보천교의 영향인 듯싶다.

제단 앞에 섰다. 경건한 마음으로 송덕비를 바라본다. 선생의 얼굴과 마주한 기분이다. ‘농산강상옥선생송덕비’ 글자마다 광체가 빛난다. “글이란 읽고 쓰고 외워야 내 것이 되는 법이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나는 초등학교 취학 전,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배웠다. 최초로 문자와 접했으니 평생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천방지축으로 뛰놀던 어린 아이가 마루에 온종일 쪼그리고 앉아 글을 읽고, 돗술붓에 물을 적셔 꼬마흑판에 글을 썼다. 오금이 저리면 소변이 마렵다는 핑계로 들락거린다. 그러면 “오줌솔태라도 걸린 게냐? 침을 맞아야 하겠구나.” 하신다. 침을 맞는 게 두려웠던 시절이다.

저녁때가 되면 그날 배운 것을 선생님 앞에 꿇어앉아 외워야 한다. 외우지 못하면 내일로 미뤄진다. 뒷날도 못 외우면 바지를 걷으라 한다. 선생은 종아리를 치며 아프냐? 아프냐? 하신다. 울상을 지으면서도 아프다는 말은 못한다. ‘사내 녀석이 참을성이 없으면 장차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야단맞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여러 날 서당을 비울 때가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보천교의 일로 육지에 나간 것이라 했다. 보천교를 기피하던 시절이지만 선생은 보천교인이 되어 은밀히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보천교에 입교한 것은 어인 일인가. 하원엔 광복 이후 민선 초대 면장을 역임한 강응규옹이 살았다. 일제의 단발령에 불복했을 뿐 아니라, 평생 상투를 틀고 살다 세상을 떠난 분이다. 애국심이 강한 보천교 지도자, 그래서 일제경찰에 끌려가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 농산 선생의 숙항이니 그분의 영향을 받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보천교는 당시 650만 신도를 품은 조선 최대의 종교단체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가장 많이 제공한 비밀단체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 옥고를 치른 사람 대부분이 보천교도였으니, 일제가 얼마나 보천교를 탄압했는지 알만하지 않은가. 그 뿐인가. 일제는 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사이비 종교로 몰았다. 그러나 농산 선생은 물려받은 재산을 축내며 독립운동 자금을 헌납했으니, 그 애국심을 평가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비문을 봉독하고 선생이 지은 한시 계명천추(揭名千秋)도 낭송했다. ‘창공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동천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처럼 대한민국은 밝았다. 공맹(孔孟)의 도를 닦아 나라를 천추에 빛내자’라는 내용의 시다. 이 또한 시비로 세웠다.

‘계명천추’ 이 시를 발견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농산 선생이 호구지책으로 서당을 연 것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을 일꾼 양성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허황된 보천교 신앙이 아니라, 구국을 위한 자기희생적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어 기쁘기 그지없다.

문하생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아! 고향에 가면 비드름물 동산에 좌정한 농산 선생을 만날 수 있어 참으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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