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의 그 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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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방영 제주한라대학 교수 / 논설위원
풍성했던 여름 햇살이 엷어지면서 초췌해지는 주변 풍경은 자연의 한 주기가 또 끝이 났음을 나타낸다. 마른 나뭇잎과 함께 우리 몸과 마음도 윤기를 잃으며, 어딘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려 자신의 계절을 가늠하고 싶어진다.

지난 여름 이국의 도시에서 마주쳤던 할머니가 간혹 생각나는 것도 이런 연유 같다.

크로아티아의 항구 도시 스플리트에서는 옛날에 어떤 로마 황제가 말년을 지내기 위해 세웠다는 요새 같은 성이 관광의 핵심이었다. 도착한 날은 그 성안 교회와 식당과 넓은 마당을 이용하면서 결혼하는 신랑·신부와, 그들을 둘러싸고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 뒤를 이어서 마당에 기계들을 갖다 놓고 음악회 실전 연습을 하려는 사람들이 관련 없는 사람들은 나가달라고 해서 아쉬운 마음으로 숙소로 왔었다.

다음 날 다시 옛 성으로 가서 제우스 신전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는 교회 내부, 교회 옆에 좁은 계단으로 오르는 높은 첨탑, 성안의 이곳저곳을 구경하였다.

라틴어 대신 모국어로 미사를 보게 했다는 대주교의 거대한 청동상은 그 엄지발가락을 손으로 비비며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말 때문에 사람들마다 만져서 발가락 앞부분만 노랗게 반들거렸다.

저녁 배 시간 전에 반나절이 남아있어서 성 밖의 노천 시장에서 간식거리를 사들고 공원으로 갔다. 공원 모퉁이에 있는 수도에 허리 높이로 돌 수반이 연결되어 개수대처럼 쓰도록 물이 흐르고 있었다.

거기에서 살구를 씻으려는데 초로의 아저씨가 필요하지도 않은 지시사항을 늘어놓기에 살구 몇 알 드렸더니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씻은 살구를 들고 벤치로 와서 여행안내 책자와 지도를 보면서 그 곳의 행적을 정리하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다가왔다.

파란 블라우스에 검은 바지, 검은 핸드백, 검은 구두, 회색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자르고, 연푸른 눈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영어밖에 못한다고 밝혔더니, 몇 가지 다른 나라 말을 해보다가, 나중에는 불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한 때 배웠지만 잊어버려서 어렵사리 알아들은 말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일본인이냐고 묻는 질문과 한국인이라고 답하는 정도였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빈 병에 물을 길어다 달라는 것 같아서 차가운 물을 가득 채워다 드렸다. 물병을 받고 자기 벤치로 돌아가는 그 표정이 어쩐지 석연치 않고,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하는 것이 보였다.

할머니는 잊고 나는 달콤한 살구, 치즈와 빵을 먹으면서 나뭇잎에 살랑거리는 산들바람과 여름해가 빛나는 하늘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또 와서 의사소통을 시도하는데 거의 필사적이었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여가면서 긴 연설을 하고,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더니, 나중에 포기하면서 돌아설 때는 거의 절망하는 눈빛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있다가, 내가 먹었던 음식에 생각이 미쳤다. 할아버지에게 나눠주던 살구를 비롯하여 다른 꾸러미를 그 할머니는 보았을 것이다. 암시를 주려고 했는데 눈치 없는 나는 혼자서 먹었던 것이다. 단정한 외양과 물 흐르듯 유창한 여러 나라 말 때문에 정작 원하는 것이 몇 조각 음식이라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하고, 간절한 소망을 간과하였던 것이다.

공원을 나오면서 작별 인사를 했지만 그 할머니는 돌아앉은 채 쳐다보지도 않았다. 미안하고 측은한 감이 들었다. 모르는 아이들이라도 꾸짖지 않으면 말 할 상대가 없고, 소외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모르며, 자존심에 갇혀있는 쓸쓸한 노년, 이를 피하려면 평소 어디에 마음을 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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