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구도자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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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현. 前 제주수필문학회장 / 수필가
미국 경제학자 스코트 니어링(1883~1983)은 저술가, 사회운동가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채식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미국의 산업주의 체제와 그 문화의 야만성에 줄기차게 도전하다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저서 ‘거대한 광기’에서 그는 ‘겉으로 내세우는 이상주의가 아니라 상업주의가 전쟁의 원인과 목표’라고 분석했고 그 과감한 주장으로 정부는 그를 군대 소집과 모병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연방법원에 기소했다. 스코트는 배심원 앞에서 스스로 사건을 변호하여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그의 이름은 전국에 말썽쟁이로 알려지고 평판이 나빠져 더는 어디에서도 가르칠 곳이 없게 되었다.

그는 오직 혼자였으며, 어떤 학교, 어떤 단체나 기관에서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윽고 아내와 가족에게서도 떨어져 나왔다. 가족관계가 깨지자, 모든 재산을 가족들에게 넘겨주고 약간의 현금과 생명보험 증서만을 가진 채 새 생활을 시작했다. 더는 추락할 곳이 없는 밑바닥 상태였다. 생활은 황폐하고 피폐했다.

이때 21살이나 연하인 헬렌이 그 앞에 나타났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그녀는 수천 권의 책을 읽으며 지성과 인성을 겸비한 청순한 여인이다. 세대 차이는 상호 보완 관계를 유지하는데 장점으로 작용할 뿐 장애요인이 되지는 않았다. 지향하는 목표가 같았고,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코트의 박학다식,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 평화구현의 소신을 헬렌은 경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흠모했다.

1983년 스코트는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8년 후인 1991년 그의 나이 87세에 발표한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헬렌은 남편이고 스승이고 동반자였던 스코트와 의 만남을 담담하게 회상하고 있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처음 코스트와 통화를 했을 때 헬렌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삶의 공허를 느끼며 그를 채워줄 무엇인가를 찾고 있던 그녀는 마흔 다섯의 스코트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그로부터 많은 연서를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은 지 4년이 흐른 어느 날 스코트는 다음과 같은 전보를 헬렌에게 보냈다. “내 책 ‘전쟁(War)’에 관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돈을 얻었습니다. 여기 와서 도와주시겠습니까?” 헬렌은 그처럼 진지한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건강, 책, 일, 그리고 여기에 사랑이 더해진다면 운명이 주는 모든 고통과 아픔도 견딜 만하다’며 주저 없이 뉴욕의 생활을 접고 새로 구입한 농촌의 농장에서 스코트의 비서 겸 조수가 되기를 자원했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구도자의 길의 시작이었다.

“내 온갖 물음에 해답을 줄 수 있는 현명한 연장자와 사는 것은 끊임없는 즐거움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 나 개인의 성질과 습관을 참을성 있게 받아주고 이해하는 선생을 가졌다”라고 쓰고 있다. 이보다 더한 찬사가 또 있을까? 이러한 남편도 드물지만 이렇게 만족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아내도 드물 것이다.

스코트가 100회 생일을 맞았을 때 동네 사람들은 “스코트 니어링이 백 년 동안 살아서 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되었다”라고 쓴 깃발을 들고 축하했다고 한다.

100회 생일이 열흘 남짓 지난 어느 날 스코트는 평온하게 죽음을 맞았다. 1000여 통이 넘는 축하와 애도의 메시지가 답지했다. 헬렌은 이들 모두에게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우리 주변에도 100회 생일을 맞은 분의 대문에 “당신이 백 년 동안 살아서 우리가 행복했습니다”라고 쓴 깃발이 나부끼는 광경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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