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같지 않은 질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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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훈. 시인/국제PEN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장
우리에게 길이란 무엇일까. 본디 길이란 인간의 의식과 주거사이를 연결하는 공간적 선형이다. 이런 점에서 길을 우리말의 언어학적 표현으로 빌리자면 양태나 규모에 따라 어떤 관형어를 붙여 오솔길, 고샅길, 산길, 들길, 자갈길, 진창길 따위가 있는가 하면 이용수단으로서의 찻길, 뱃길, 철길, 하늘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길의 의미는 교통수단으로서의 길 만은 결코 아니다. 인간의 정신문화가 깨쳐지면서 철학적 의미가 부여된 길도 있다. 어떤 일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취해야 할 수단이나 방법을 뜻하는 ‘방도(方途)로서의 길’과 정신문화의 일환인 소위 인생살이 길과 같은 ‘행위규범으로서의 길’이 여기에 속한다 하겠다. 그렇다면 근년에 들어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제주에서의 올레길은 어떤 유형의 길일까.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제주올레길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산티아고 길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제주에도 만들 수 있음을 깨닫고 ‘나만의 길을 만들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서명숙이 구상한 올레길의 동기가 순례길에서 였다면 이는 분명히 순교자적 정신을 바탕에 둔 올레길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러한 정신이 아니고서는 감히 실행할 수 없는 길이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려고 걸었던 길, 프랑스 남부국경으로부터 시작해서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지방을 가로질러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장장 800㎞에 달하는 거리다. 한 달 여를 꼬박 걸어야 할 만큼 고행이 담긴 길이다. 그는 그 고행의 길을 걷는 순간순간마다 ‘강 같은 평화’를 느꼈다고 한다. 또한 그가 걷는 그 길은 ‘마음의 상처를 싸매는 붕대, 가슴에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는 지혈대 노릇을 했다’고도 했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던 꽃들이, 눈에 띄지 않던 풀들이, 들리지 않던 새소리가 천천히 마음에 와 닿았다’고도 했다. 그는 제주의 올레길에도 그러한 감동이 수놓아지기를 꿈꾼 것이다.

그 길에서 제주사람들의 삶을, 제주사람들의 체취를, 제주사람들의 믿음을, 제주사람들의 나눔을, 제주사람들의 노역을, 제주사람들의 꿈을, 제주사람들의 사랑을, 제주의 나무와 돌과 바람과 파도와 가없는 흔들림의 풀잎사귀와 갖가지 꽃들과 돌멩이와 빌레왓과 빌레길과 지칠 줄 모르는 밭갈 쇠(牛)들의 억척과 모둠발로 일어선 제주말(馬)들의 울음소리와 바람을 거스르는 까마귀 떼들과 참새와 직박구리, 동박새와 고망독새와 밥주리와 속새와 그리고 종달새, 하늘 높은 제주들녘과 귀양살이에 지친 어느 선비의 양심과 그 양심이 뿌리내린 바닷가 숨비기 넝쿨과 그 넝쿨 속에 피어나는 숨비기 꽃향기와 물숨 먹은 해녀의 긴 한숨과 땀 절은 초가집 울타리 동백꽃 사연과 ‘4?3’의 영혼들과 등 굽은 노파의 마르지 않은 눈물과 함초롬히 비껴선 외갓집 올레 같은 그런 것들이 함께 어우러진 올레길을 꿈꾼 것이다.

한 무리의 올레꾼이 잰걸음으로 내 앞을 지나간다. 그들이 들고 가던 종이 몇 장이 바람에 날리다가 내 앞에 멎는다. 어느 올레꾼이 제주올레 웹 사이트에 올린 ‘…제주올레코스를 다녀와서…’라는 제목의 여행후기다. 사진을 곁들인 이 글은 한마디로 아름다운 제주 해안가와 오름과 들녘의 멋진 풍광과 함께한 칭송의 만찬이다. 어느 예술인들이 제작하였다는 조형물까지도 곁들이면서.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글 어디에도 제주인의 삶의 현장, 제주인의 역사, 제주인의 모습을 담아낸 글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내게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던져 본다. 제주의 올레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의 길이 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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