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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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수필가
장자(BC369~BC289?)의 ‘바닷새 이야기’에서 사랑의 지혜를 엿본다.

“…옛날 노나라 수도 밖에 바닷새가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서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 음악을 연주해 주며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왜 죽었을까? 임금은 자기 방식대로 지극정성을 다해 새를 사랑하려 했지만 새의 입장에선 견디기 힘든 속박이 되고 말았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를 건강하게 사랑할 방법은 없었을까? 혹자는 자연 상태로 풀어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라 여길 것이다. 그렇지만 노나라 임금이 그러하겠는가. 새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곁에 두려 할 게 분명하다. 그러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바닷새를 한껏 사랑하려 들 것이니.

‘바닷새 이야기’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심각한 사랑의 모순을 내포한다.

우리 주위에서도 이런 안타까운 사랑의 모순을 보게 된다. 사랑이 덫이 되어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불상사들을. 그러고 보면 사랑이란 행복의 가면 속에 불행의 고통을 숨겨 놓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사랑하는 마음의 이면에는 상대도 나를 사랑하길 갈망한다. 겉으로는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할지 모르지만, 그건 자기기만일 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다는 것, 그게 사랑이란 감정을 가질 때 인간이 소망할 수 있는 지고의 행복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는 우리의 삶 주변에 허다하다. 이는 결국 불행을 낳게 되고.

이런 일방적인 사랑이 생겨나는 까닭은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알려고 하는 존재’여서 그렇단다.

내 사랑의 대상은 타자(他者)다. 타자는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과 가치를 따르는 존재다. 그러므로 타자의 속내를 읽어내야 그에 알맞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타자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은 이를 무시하려 든다. 그래서 장자는 사랑에 앞서 타자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부터 비우거나(虛) 잊으라(忘) 한 것이다.

우리는 소통(疏通)이란 말을 흔히 쓴다. 소통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번역어 정도로 이해되지만, ‘트다’라는 뜻의 소(疏)와 ‘연결하다’는 뜻의 통(通)이란 글자로 구성된 보다 심오한 개념이다. 막힌 곳을 터서 물이 잘 흐르도록 하는 작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나 해야 할지…. 특히 ‘소’의 개념은 장자가 말했던 비움이나 잊음과 같은 맥락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을 파괴해야 하는 것,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든, 이성 간의 사랑이든, 아니면 그 누구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의 전제 조건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의 장애를 허물고 소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타자가 마음을 열고 나에게 다가올 때까지.

2000여 년 전 장자의 사랑 이야기를 꺼내봐야 할 정도로 오늘의 사랑의 양태는 너무 조급하고 일방적이다. 인스턴트식품으로 즉석 요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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