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장 김익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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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시인 / 소설가
‘나는 제주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한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제주4·3의 의인(義人) 김익렬(金益烈)은 1969년 그가 집필한 회고록 ‘4·3의 진실’에서 기술한 부분이다. 김익렬은 1948년 4월 17일 미군정으로부터 진압작전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선 선무, 후 토벌’ 원칙을 세워놓았다. 4월 28일 더 이상의 피해를 막고자 무장대 김달삼(金達三)과의 회담을 가져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결국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전투를 72시간 이내에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

시인 고은(高銀)은 그의 시 ‘9연대장 김익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약속지점으로 갔다//산의 지도자 김달삼은 ‘백두산’을 피웠다/연대장은 ‘러키스트라이크’를 피웠다/두 사람은/전투 중지에 합의했다//선 선무/후 토벌의 원칙에 따랐다//그가 돌아왔다/제주도의 평화를 안고 왔다.’

그러나 미군정이 김익렬·김달삼의 평화회담을 무시하고 강경 진압 방침으로 선회하였다. 5월 5일 수뇌부 회의에서 김익렬은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과 충돌하기에 이른다. 결국 제9연대장에서 해임되어 여수 주둔 제14연대장으로 전출되었다. 후임에는 박진경(朴珍景)이 부임하여 강경 토벌 작전을 추진하다가 6월 18일 부하에게 피살된다.

시인 고은의 ‘9연대장 김익렬’은 계속된다.

‘그러나 제주도에 건너온/군정청 조병옥 부장은/그를 빨갱이와 내통한 빨갱이새끼라고 대들었다/조병옥의 멱살을 잡았다/난투극/민정장관 안재홍과/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이 말렸다/딘 소장은 구경하고 있었다//다음날 김익렬 연대장은 딘에 의해 해임되었다/제주도의 평화가 여기서 깨졌다/제주도의 학살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제주4·3은 분명히 미군정 시기에 발발했고, 그 배경에는 미군정이 도민에 대한 무리한 탄압이 작용했다. 김익렬·김달삼 평화협상을 깨는 계기가 되는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에 미군정이 개입했고 강경진압을 지시한 주체가 미군정이라는 증거들이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2008년 4월 26일. 제주도는 김익렬 유족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유족들은 1989년 유고록을 공개한 후 유품 등 10점을 제주4·3평화기념관에 기증했다. 그의 유족들은 김익렬의 유고록 원본과 유고록 집필 때 사용했던 만년필, 잉크, 안경, 망원경 등이 전시된 상설전시실과 ‘의인코너’ 등을 돌며 ‘참군인’의 길을 걸었던 고인의 뜻을 가슴에 담았다.

2010년 3월 21일.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는 ‘한겨레신문’기고문을 통하여, 참군인 김익렬 장군의 민족적 자부심에서 우러난 투철한 위민정신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전개할 것을 제안했다. 그 하나로 김익렬 장군의 동상을 건립하여 그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김익렬 장군 상’을 제정하여 민족·민주 모범 군인을 뽑는 사업 그리고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로 개정하는 것 등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는 것이 기고문의 내용이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김달삼과 직접 담판하는 등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김익렬. 무차별 대량학살의 초토화 작전만은 기필코 막겠다는 일념으로 미군정과 경찰에 맞서 고군분투했던 김익렬. 치안 총책임자 조병옥과 맞닥뜨려 그의 비인도적이고 반민족적인 작태에 대해 육탄을 던져 처절히 질타한 김익렬. 그는 4·3의 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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