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연풍(海軟風)’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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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前 제주문인협회장 /시인 /수필가
‘밭에서 돌아오는 일꾼들이여, 그의 자신들은 스스로 맞이하려고/ 비로소 해연풍은 오는 이들과 그대들의 삥 둘러선 가슴둘레를 씻으며/ 이 고장의 질긴 협죽도 꽃들을 마지막에 씻으리라.’

고은 시인은 ‘해연풍’을 낯선 눈길로 봤다. 섬사람들의 가슴을 씻어낸 뒤 협죽도 꽃을 씻으리라 한 것. 협죽도를 ‘질긴’이라 한 표현도 시선을 붙든다. 꽃이 갖는 독성(毒性)을 비유하면서, 그걸 맨 마지막에 씻는다 한 것은 섬사람들의 억척스러운 삶을 빗댐일 법하다. 해연풍이 그런다는 것이다. 독특한 메타포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풍경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느낌이다. 해연풍은 낮에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바람으로, 밤에 육지에서 바다로 부는 육연풍의 반대말이다. 어감이 부드럽다. 살포시 다가와 비단결 고운 손으로 낯을 살살 간질일 것만 같다. 가끔은 웬 심술로 한 움큼 바닷가 모래를 쥐고 달려와선 내 몸뚱어리에 확 끼얹고 달아날 개구쟁이는 아닌지 모르겠다.

한때 고향을 등지고 대처에 삶을 부렸던 적이 있다. 적응과는 별개로 거기 머문 3년이 시종 낯설었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한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여름의 초록처럼 뼛속까지 사무쳤다.

고향 하면 떠오르는 많은 말들. 그 가운데 향수를 자극하는 어휘가 있었다. 해연풍이다. 참 나긋나긋 정겹고 살가운 말이다. 오뉴월, 아파트 귀퉁이 나무 그늘에 누우면 얼굴 위로 섬의 바닷바람이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환상에 젖곤 했다.

귀향한 나는 통과의례를 거쳐 1993년 문단에 데뷔했다. 등단을 서둔 사연인즉 이전부터 가슴에 품었던 소원이 있었다. ‘제주일보’의 ‘海軟風’을 쓸 수 있었으면 하는 것. 기준이 엄격해 아무나 필진이 될 수 없었다. 등단 작가라야 했다. 그것은 신문의 자기검속이었을 것이다. 필진에 합류함으로써 등단 2년째 마침내 꿈을 이뤘다. 유명을 달리한 故 김규필 기자님의 따뜻한 배려 덕이었다. 중학교 2년 선배인 그분은 내게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다. 회상 속에 그분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김 선생, 등단했으니 해연풍을 쓰게 해야지. 약속인데….” 그래서 1995년 말부터 1998년까지 만 3년을 썼다. 인연의 일이었다.

이제 다시 ‘제주일보’로 돌아온다. 대단한 일은 아니나, 내게는 예사롭지 않다. 공연히 밖을 서성이다 친정에 돌아온 느낌이다. 나는 지금, 연어의 모천회귀를 생각한다. 강에서 산란해 치어로 일 년을 살다 바다로 내리는 연어. 그들에겐 자기가 태어난 하천으로 돌아가 다시 알을 낳는 회귀본능이 있다. 그러기 위해 역류해야 한다. 그들의 역류는 사투다. 제 살던 곳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회귀율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형어류, 새나 곰 같은 천적에게 잡아먹히는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감, 연어는 어째서 그런 처절한 승부에 목숨을 거는 걸까. 운명이다. 비켜가지 못하는 그들의 운명일 것이다.

‘제주일보’는 해방되던 해, 1945년에 창간한 몇 안 되는 지방지 중의 하나다. ‘불휘 깊은 나무’, 자체로 제주의 자존심이 아닌가. 근심지목(根深之木)인지라 우연만한 강풍엔 요지부동일 것을 우리는 굳게 믿는다. 원체 흔들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쓰러질 리 만무하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두어 해 뒤 고희 아닌가. 그동안 쌓은 반듯한 경륜이 산처럼 돌올하고, 다져놓은 지반이 위에 더할 것 없이 견고하다. 그건 지금 당장에 실감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이 어둡고 어수선한 혼돈과 인욕의 한때를 지나고 나서,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냉한을 훔쳐낼 때 그때쯤, 가슴 쓸어내리며 환호할 일이 아닐는지.

크든 작든 인연은 65억분의 1의 확률이라 한다. ‘제주일보’와는 소중한 인연이다. 좋은 글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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