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민들의 애환과 삶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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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제주의 등명대(도대불).... 일제시대부터 어촌에서 자발적 건립 및 운영
▲ 1941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자구내포구에 세워진 등명대. 곡선미와 세련미가 뛰어나 가장 아름다운 등명대로 꼽히고 있다. 최근 차량이 충돌하면서 벽체는 크게 금이 갔다.
등명대(도대불)는 제주에만 있는 민간 등대로, 어민들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줬던 불빛이었다.

육지의 전통 포구는 모래로 이뤄진 만(灣)에 들어선 반면 제주의 포구는 용암지대가 널려 있어 밤에는 그 위치를 알려줄 불빛이 필요했다.

조명시설이 없던 시절, 뱃사람의 아낙들은 비바람이 부는 밤이면 횃불을 들고 마중을 나갔고, 이를 ‘갯불’이라 불려왔다.

일제시대에는 도내 포구마다 등명대가 건립됐다. 어민들이 설치하고 운영의 주체가 되면서 축조 방식이나 모양이 제각각이다. 불을 밝혔던 방식도 마을마다 다양했다.

사료와 증언에 따르면 대다수 어촌은 마지막 배가 들어오면 불을 끈 반면, 애월읍 구엄포구는 365일 내내 불을 밝혔다.

조천읍 북촌리 등명대는 표석에 세워져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문에는 ‘대정(大正) 4년(1915년) 12월 건립’과 ‘어즉위(御卽位) 기념’이 새겨졌다.

‘어즉위’는 임금의 즉위를 이르는 일본어로 그해 11월은 다이쇼(大正) 일왕 즉위식이 열렸다.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은 1969년 7월 완공된 구좌읍 하도리 등명대다.

김태일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가 전수 조사를 한 결과, 확인된 등명대는 모두 16곳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6곳은 소멸됐고, 10곳은 현재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등명대는 제주시 용담동, 애월읍 구엄·애월리, 한림읍 귀덕리, 한경면 두모·고산리, 조천읍 북촌리, 구좌읍 김녕리, 서귀포시 대포·보목동이다.

모양은 원통형, 마름모형, 항아리형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각 마을에 있는 석공과 주민들이 동원돼 돌을 직접 나르고 쌓으면서 획일적인 모양을 갖추지 않고 있다.

특이한 것은 두모리 등명대인 경우 조선 시대 축조된 연대(煙臺) 위에 세워졌다. 멸실된 외도동 등명대 역시 연대 위에 건립됐다.

높이는 대개 2~3m로 계단이 있는가 하면 사다리를 놓고 등탑 위를 오르기도 했다.

연료는 당시엔 귀했던 석유와 함께 송진이 엉긴 소나무 가지, 어유(魚油) 등을 사용했다.

어유는 상어 기름 또는 각종 생선 내장을 썩힌 다음 졸여서 만들어냈다. 값이 비싼 석유는 어민들이 돈을 갹출해 마련했다.

돛단배를 타고 밤바다에 나가 갈치와 고등어를 잡았던 어민들을 위해 불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불 담당은 ‘불칙’이라 불렸고, 어민들이 돌아가며 당번을 정하기도 했지만 포구에 사는 주민을 지정하기도 했다.

유리 상자에 넣은 호롱불은 비바람에 꺼질 때가 많았다. 배가 들어오지 않으면 노심초사 걱정하는 가족들이 먼저 달려가 불을 다시 밝히기도 했다. 대개 소등은 맨 마지막에 들어온 배가 맡았다.

귀덕리 등명대인 경우 생업에 종사하기 힘든 마을 유지에게 맡기고, 고깃배 한 척마다 고급 어종으로 1~3마리를 수고비로 줬다고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구엄리는 고참 어부와 마을 책임자가 등명대를 관리했는데 조업을 나간 어부로부터 의무적으로 한 마리의 생선을 거두었다. 이를 판 돈을 모아 등명대 시설이나 포구 보수 등에 썼다.

고산리 자구내 포구에 있는 등명대는 마름모형의 기단에 자연석으로 쌓고, 하얀 시멘트로 마감한 독특한 방식으로 건립됐다. 완만한 곡선미와 세련미는 수월봉 바다와 잘 어우러져 가장 아름다운 등명대로 꼽히고 있다.

세월이 흘러 어촌에도 전기가 들어오면서 1970년대 말 등명대의 빛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좌동철 기자 root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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