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4·3 그리고 트라우마(Trau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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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훈. 시인/국제PEN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장
성산포 일출봉 앞 속칭 터진목 앞바르 모래밭, 한 무리 사람들이 파랗게 겁먹은 표정으로 낡은 트럭에서 내린다. 노인과 청장년과 부녀자와 등에 업힌 젖먹이와 손에 이끌린 어린아이들까지 족히 20~30명은 될법하다. 장총을 멘 장정들이 종대형으로 그들을 몰아세운다. 그리고 수십 발의 총성, 그 자리엔 흰 와이셔츠차림의 그녀 남편도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무자년 가을의 일이다. 그리고 이듬해 늦게까지 그녀의 시부모, 시동생, 시누이남편, 시댁사촌과 외사촌 등 온 가족 친지들이 그렇게 끌려와 죽어갔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살아 돌아온 사람도 있다. 아들이 어머니를 살려낸 예다. 그녀 시누이남편이 바로 어머니를 살려낸 장본인이다. 총성과 함께 그 아들의 가슴엔 총알이 박혔다. 순간 그는 그의 어머니를 덮쳤다. 그의 어머니도 총을 맞았는지 꼼짝없이 아들의 가슴팍 밑으로 넘어지며 깔렸다. 밤이 이슥했다. 한 여인이 죽은 아들 품에서 깨어났다. 아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선혈로 범벅이 된 체다. 아들이 그의 어머니를 몸으로 덮쳐 살려낸 것이다. 같은 시각 어미 등에 업힌 체 총을 맞았던 이웃동네 젖먹이도 꼼지락 거리며 깨어났다. 이건 분명 기적이다. 산불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나무라는 나무와 풀이란 풀들이 모조리 불타 흔적 없는 것 같아도 몇 그루의 나무와 풀잎들이 그래도 살아남아 이듬해 봄이면 새싹이 돋아나고 꽃을 피우는 것처럼.

그 기적은 그녀에게도 일어난 걸까. 마을 공회당엔 매일같이 주민들을 불러 모으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을의 몇 사람씩은 끌려갔고 그렇게 그들은 터진목 그곳에서 죽어갔다. 달그림자도 지고 없는 으슥한 밤이다. 그녀는 열 살 된 딸, 여덟 살 된 아들, 그리고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젖먹이 딸을 품에 안고 언제나처럼 겁먹은 밤을 지새우고 있을 시각이다. 낡은 창호의 문틈을 스치는 섬뜩한 그림자 몇, 그리고 이어지는 가느다란 목소리, ‘형수님! 형수님! 나 배고판 와시매 먹을 거 호썰 줍써.’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행방불명 된지 오랜 그녀의 막내 시동생이다. 순간 그녀는 발길로 창문을 걷어찬다. 그리고 소리 지른다. ‘어떤 놈이냐! 나를 형수라고 부르는 놈, 언제 날 봤다고 형수라고 부르느냐!’ 고함치며 그 목소리의 주인을 쫓는다. 순간 장총을 맨 순사들이 어슬렁 어슬렁 꽁무니를 뺀다. 행방불명 된 그녀의 시동생으로 인해 처형당한 그녀의 시댁 식구들처럼 그녀를 옭아매기 위해 꾸며낸 순사들의 함정이다. 그 같은 함정 수사는 그 후에도 몇 번씩이나 이어졌다. 심지어 그녀의 집 어딘가에 숨었을 거라는 미명아래 집까지 불태웠고 100년 넘은 팽나무마저 베어버리고 말았다.

그날도 공회당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이 공회당 마당을 채웠다. 총을 맨 순사들이 그녀의 세 자녀와 함께 그녀를 호명한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동내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편들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고 대들었다. 사실 그녀의 가족이 일본에서 귀국한지는 3년에 불과하다. 동네사람들은 그녀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재봉틀에서 헌옷가지들을 고쳐 입을 수 있었고 새 옷을 만들어주면 입기도 했다. 그것 외에도 그녀는 무엇이든 동네사람들에게 나눠주기를 즐겨했다. 그만큼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았다. 그 덕에 그녀는 그녀의 세 자녀와 함께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그녀의 나이 이제 101살, 오늘 아침도 그녀는 어김없이 정화수 한 그릇 받쳐놓고 동쪽을 향해 기도한다. 그러나 밤마다 그녀를 찾아오는 몽유병 같은 악령은 그녀에게 창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트라우마로 시달리게 한다. 바라건 데 그녀에게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기적 한 번 일어나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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