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vs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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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영. 제주해녀문화보존회 대표
조선 시대 제주로 유배 온 이건(李建)이 쓴 ‘제주풍토기’는 제주의 지리, 기후, 동식물, 사회, 농경, 신앙, 풍속 등 제주의 당시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15단락으로 이루어진 기행록이다. 그 중 12단락에는 당시 제주도의 동식물 현황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제주도에는 호랑이, 곰 등의 흉악(凶惡)한 짐승도 없고 토끼, 까치 등의 동물도 없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람들이 길조(吉鳥)라고 좋아하는 까치(학명:Pica pica serica)는 까마귀와 함께 참새목(order), 까마귀과((family)) 까치속(genus)에 속하는 텃새로 원래 제주에는 없었던 종이다. 제주의 까치 부재에 대해서는 까치 날개의 구조적 특성과 지구력 부족으로 감히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 제주까지 장거리를 비행할 수 없어서 그렇다는 설과 설사 어찌하여 왔다하더라도 제주의 강한 바람으로 생존 및 번식이 어려웠을 거라는 설이 있다. 그러던 제주도에 까치가 살기 시작한 것은 1989년 무렵이었다. 대한민국 남단인 제주도에서도 길조인 까치 소리를 들리게 하자는 국내 모 항공사와 모 언론사의 기획으로, 전국 각지에서 포획한 까치 53마리를 제주도 관음사에서 방사했고, 이 뉴스는 TV와 신문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방사로 인해 제주도에 이입된 까치는 육지보다 바람이 몇 배나 거센 제주의 풍토에 잘 적응했고, 급기야는 제주 토종이고 몸집도 자신보다 월등히 큰 까마귀를 산악지역으로 쫓아 보내고 말았다. 까치가 등장하기 전만 해도 겨울에 제주 벌판에서 몇 백, 몇 천 마리 까마귀가 날아오르는 날갯짓과 울음소리로 장관이었던 풍경은 이제는 까치의 그것으로 대체되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이렇게 까치는 ‘설’하면 떠오르는 상서로운 길조(吉鳥)로, 칠월 칠석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위해 자기머리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오작교(烏鵲橋)를 놓기 위해 돌을 이고 나르던 충조(忠鳥)로만 인식 되어 왔다. 하지만 ‘야생동물별 농가피해 조사’에 따르면 까치는 노루에 의한 피해 다음으로 많은 농가 피해를 주는 야생동물이 되었다. 환영받으며 고이 모셔왔던 까치는 이제 개체 수는 10만을 육박하며 길조에서 갑자기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였다. 행정당국은 까치를 유해야생동물로 규정하고 엽사로 이뤄진 까치포획단을 구성해 까치 포획에 나섰다.

제주도에는 제주도 텃새인 까마귀와 큰부리까마귀 그리고, 겨울철새인 떼까마귀와 갈까마귀 이렇게 4종류의 까마귀가 있다. 모두 까마귀과 까마귀속에 속하지만 서로 다른 종이며 특히 겨울철새인 떼까마귀, 갈까마귀는 원래 주로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서 들판이나 농경지가 발달한 남쪽으로 내려와 겨울을 난다. 까마귀는 그 외관과 독특한 울음 소리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 흉조(兇鳥)로 인식되었고 불길한 예언능력이 있는 영물(靈物)로 믿어졌다. 또 한편에서는 그 선입견과는 다르게 ‘까마귀도 석 달 열흘이 지나면 부모의 공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부모를 공양하는 습성이 있고 이 때문에 효조(孝鳥)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유반포지효(烏有反哺之孝)는 까마귀의 효심을 말한 한자성어이다. 하지만 이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인간의 고정관념이 빚어낸 오해이다. 어미 까마귀가 이미 어미 만큼 성장한 새끼 까마귀에게 모이 주머니를 통해 먹이를 꺼내 주는 모습을 마치 자식이 어미에게 먹이 주는 것으로 오인해 벌어진 속담이다.

동물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편견과 오해 그리고 인간의 편의나 이용가치에 의한 인위적 분류에 의해 이들의 운명이 좌우된다. 오늘 따라 그들의 모습이 그들의 울음소리 만큼이나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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