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산지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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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서울 시민의 젖줄이라면 산지천은 제주 시민의 젖줄이었다. 오등동 남쪽에서 발원해 한라산 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산지천은 바다와 만나는 하류에서는 샘물이 풍성하게 솟아나와 목마른 제주읍성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 줬다.

1565년 제주읍성을 동쪽으로 넓히면서 산지천은 드디어 성내로 들어오게 된다. 왜구에 대항하면서 성을 지킬 때 물을 확보하려는 당시 제주목사의 과감한 결단이었다.

산지천을 따라 ‘가락쿳물.노리물.산짓물.지장깍물’ 등이 있어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하면서 시민들의 심신을 풍요롭고 깨끗하게 만들었다.

가락쿳물이 모인 ‘가락쿳내’는 ‘산지내’라고도 불리는데 물이 얼음처럼 차서 예로부터 제주시내 사람들은 한여름에는 이 물로 몸을 씻어 더위를 잊었으며 물맛이 좋아서 제주목사도 꼭 이 물을 길어다 먹었다.

이런 산지내에 대해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성 동쪽 1리에 있으나 곧 가락천 하류다. 2리쯤 흐르면 바다로 들어가 건입포가 된다. 지금은 성안에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산지천 하류에는 산지포구가 있어 이곳에서 고기 낚는 아름다운 모습을 ‘산포조어’라고 해 영주 10경 가운데 하나로 꼽았으며 ‘탐라순력도’에는 ‘건포배은’이라고 선비들의 이별을 묘사하기도 했다. 하류에는 은어가 많아 조정에 진상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산지천은 장마철이면 물난리로 큰 피해를 끼쳐 제주인들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이와 함께 건입동 ‘산짓개’ 앞에 있는 산지축항은 예로부터 천연의 항구였다. 서부두에 방파제를 쌓고 사라봉 ‘구릉곶’에도 제방을 쌓는 등 인공적인 노력이 계속돼 산지항은 국제적인 부두로 확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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