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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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중장년층은 초등학교 시절, 봄과 가을에 학교에서 편지를 썼다.

5월이면 ‘부모님께’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그동안 철없이 굴었습니다. 앞으론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였다.

9월이면 ‘용감한 국군아저씨께’ 국군의 날 위문편지를 썼다. 보통은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였지만 그래도 썼다 지웠다 공을 들였다.

대학시절 서울로 유학간 지방학생들은 하숙집에서 간간이 ‘아버님께’ 하는 편지를 부치고 며칠 뒤면 “건강에 유의해라”는 전화가 오고 난 뒤 우편환이 도착했다.

▲이 뿐이랴.

누구나 친구, 연인에게 편지를 쓰느라 밤을 지새운 다음날 빨간 우체통을 찾아갔다.

편지란 참 묘한 것이다.

마지못해 쓴 위문편지에도 답장이 오면 기뻐했다.

하물며, 친구나 연인에게 온 편지는 두고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읽고 가슴에 새겼다. 그래서 어떤 편지는 수 백 번 읽고 또 읽어서 편지 전문을 다 외웠다.

이런 편지는 이제 e메일과 휴대전화 문자서비스가 급증하면서 구경조차 힘들어졌다.

▲청마(靑馬) 유치환(1908∼1967)은 연인이었던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에게 살아생전에 무려 5000통의 편지를 썼다. 그의 시 ‘행복’은 정운에게 보낸 편지였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청마는 이런 시 편지를 주로 우체국에서 썼다.

비록 두 사람이 이루어지진 못했어도 진실로 행복했을 것이다.

사람이 한 세상 사는 데 5000통의 편지를 쓴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도를 보니 5 ·31 지방선거 관련 우편물이 폭증해 도내에서만 63만 3000통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제주체신청이 오는 31일까지 우편물 특별소통기간으로 정했다.

요즘 우리 집 우편함에 쌓이는 건 이런 종류의 선거관련 홍보물이거나, 정기구독 잡지, 고지서, 동문회보, 광고 선전지 정도다.

편지는 없다. 그래선지 가슴 설레며 편지를 넣었던 빨간 우체통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에 띄질 않는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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