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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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前 제주문인협회장 / 시인
‘세상은 한 권의 책’이라 말한다. 이를테면 여행을 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라는 비유 또한 그럴싸해 보인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으려면 세상을 주유해야 하는가. 배나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두루 여행할 수 있으면 좀 좋으랴만 어디 사람의 형편이 거기에 닿겠는가. 재력 있는 호사가들이나 누리는 경계일 뿐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서민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비유야 어쨌든 책이 없으면 삭막하다. 메모수첩을 뒤지다 반짝 빛나는 글귀를 만났다. 오랜만의 해후다. 뿜어내는 빛이 보석보다 더 찬연하다.

‘책이 없으면’ 하고 전제하고 있었다.

‘책이 없으면 하느님은 말씀을 잃고, 정의는 잠들고, 과학은 멈추며, 철학은 절름거리고, 문학은 벙어리가 되는가 하면, 결국 세상은 어둠에 묻힐 것.’

진리는 언제나 대하는 순간순간 짜릿하다. 책 곧 말씀이다. 책이 없으면 정의는 잠들어버릴 것이고, 과학은 더 나아갈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철학이 파행의 걸음을 걸으면 사회 전체가 기우뚱해질 것은 어렵잖게 상상이 미치는 대목이다. 밝고 맑게 살 수 있는 지혜는 정신적 균형에서 나올 것 아닌가. 문학은 당연히 입을 다물 것이다. 책 없는 문학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국에 가서 세상은 암흑에 휩싸이고 말 것이라는 예언적 선언이다.

무심결에 ‘옳소!’ 하고 추임새부터 넣는다. 언즉시야(言則是也)다. 토란잎에 되록되록 구르는 아침이슬 같은 영롱한 말씀이 아닌가.

책은 읽는 것, 저자의 입장에서는 독자에게 읽히기를 원하는 것이다. 독서야말로 책 속에서 양식을 얻어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도모하려는 정신의 구체적인 충전 행위다.

말은 쉽지만 실행이 어려운 게 독서다. 내 경우, 일 년에 몇 권의 책을 읽느냐고 누가 물어 온다면 대답이 궁색해지고 말 것 같다. ‘몇 권’이라고 수량화해 말하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해 단행본을 끝까지 독파한 경우가 적어서 그런다. 읽는 책의 대부분이 문학잡지라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문학잡지야 월간 격월간 계간 형식인데, 그런 주기로 구독하거나 보내오는 것들이라 습관적으로 읽게 마련이나 몇 권이라 셈하기는 아무래도 그런 것 아닌가. 아무튼 부끄러운 일이다. 쓰기에 치중하다 보니 읽는 데 소홀하게 된다 함은 지나친 자기합리화다.

한국인의 독서열은 어떤가에 생각이 미치고 나면 아연실색하게 된다. 몇 년 전의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40%가 일 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우리를 충분히 놀라게 하는 일이다.

책을 많이 읽는 국민으로 알려진 나라가 일본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세계가 인정하리만치 그들의 독서열은 높다. 적대시하는 것은 역사적 배경에 고여 있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고, 현실은 별개로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하철을 타 보면 놀랍게도 대부분이 책을 펴고 앉았다. 콘사이스를 만든 축소지향의 취향대로 가벼운 문고판이다. 어느 특파원의 르포기사가 생각난다. “거리에 나가 보면 서서 책을 읽는 풍경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건널목 앞에서 한 손에 우산을 들고 한 손에는 책을 펴 들고 읽는 모습 또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들은 젖먹이 아기에게 책을 보여주며 즐거워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책과 함께 노는 습관이 저절로 몸에 배도록 한다. 이를테면 아기엄마가 아기를 뒤에서 안고, 할머니가 책을 펴서 보여주면 아기가 웃으며 두 손으로 책을 잡는, 그런 포스터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까. 한일축구가 벌어지면 죽자 사자 하면서도 노벨 문학상의 스코어는 알고 있는지. 0 대 2다. 이게 독서열이 가져 온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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